넝쿨 꿈을 꾸던 여름

떨어진 능소화를 주워 눈에 부비니
원하던 빛 속이다

여름 꿈을 꾸고 물속을 더듬으면
너르게 펼쳐지는 빛의 내부

잠은 꿈의 넝쿨로 뒤덮여 형체를 잊은
오래된 성곽 같지

여름을 뒤집어 꿰맨 꽃
주홍을 내어주고 안팎을 바꾸면
땅 속에 허리를 담근 채 다른 자세를 꿈꾸는
물의 잠시(暫時)

꽃은 물이 색을 빌려 꾸는 꿈
옛 꽃들에 둘러싸인 검은 돌벽 위로
생소한 돌기를 내뿜으며
무수히 가지를 뻗는 여름의 넝쿨

눈 없는 잎사귀들처럼
뜨거운 잠의 벽을 기어오르면

눈동자 위로 쏟아져 내리는
빛의 손가락들

입술을 뒤집고 숨을 참으니
원하던 꿈 속, 물꿈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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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로 쓰는 옥탑방에서 능소화를 키운 적이 있다. 능소화를 키우는 것은 오래 전부터의
꿈이었다. 여름 골목을 지나다 문득 마주치는 그 치명적인 주홍들을 소유하고 싶었던 욕심이었다. 사람이 색을 소유할 수 있을까. 옥상 화분에 능소화를 심는다고 하여 그 주홍이 나의 것이 되는 일은 아님을 알았지만, 그래도 굳이 데려다가 꽃을 심었다.

그런데 화분에 묘목을 심고 여름 내내 자라는 것을 지켜보니, 능소화는 내가 생각하던 우아하고 아름다운 꽃이 아니었다. 그 주홍 괴물은 무섭게 넝쿨을 뻗어나갔고, 그것도 곧게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폭죽처럼 여기저기로 튀어나갔고, 많은 넝쿨마다 괴이한 돌기들이 여럿 돋아나 그 돌기들을 발처럼 이용하며 뜨겁게 달궈진 벽돌 담장을 기어 올라갔다. 그건 아름답지만 두려운 광경이었다. 멀리서 본 능소화는 마냥 우아하고 색기 넘쳤으나, 가까이서 키워본 능소화는 절박하고 시끄럽고 선연했다. 그래서 그 꽃은 어쩐지 더욱 아름다움의 비유처럼 느껴졌다.

능소화는 “하늘을 능멸하며 피는 꽃”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 특유의 넝쿨이 하늘을 타고 오를 기세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 색은 소리를 지르는 듯 선명하여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자신을 감출 필요가 없는 최상위 포식자 같다. 그래서 나는 다른 시에서도 능소화를 생각하며 “독 있는 자 마음껏 아름다우라”는 문장을 적은 적도 있다.

독은 없지만 능소화 역시 위험한 식물이다. 능소화를 만지고 눈을 비비면 실명한다는 옛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실제로 능소화 꽃가루는 뾰족한 갈고리처럼 생겨 결막염을 유발할 수 있다고 한다. 꽃이 실명을 돕다니, 아이러니한 이야기다. 꽃이 선물하는 실명은 어둠이 아니라 빛 속에서의 맹목일까.

처음에는 징그러워 바라보지도 못했던 능소화 넝쿨 줄기에 돋은 돌기들을 바라보며, 아름답기 위해 필사적인 것들을 떠올린다. 양반집 마당에만 심었다는 꽃, 급제하면 머리에 달던 귀한 꽃이 능소화다. 마음이 몸을 빌려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 우리의 생이라면, “물이 색을 빌려 꾸는 꿈”이 바로 꽃이다. 그렇기에 꽃의 빛깔과 형체를 사랑하는 일은 잠시 빌려 얻은 우리의 육체를 사랑하듯 허망하지만, 그만큼 아름다움을 최대한 존중하고자 하는 자세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꿈 속에서 사랑하지만, 그 꿈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꿈 밖에서 형상과 색을 빌려올 수밖에 없다. 꿈을 얻기 위해서는 고요하고 괴로운 잠의 과정이 필요하지만, 그렇게 지금의 생으로부터 빌려온 꿈 속에서 우리는 자신 안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겨우내 기어이 뿌리까지 얼어 죽은 옥탑방의 옛 능소화를 떠올린다. 그 주홍은 나의 것이었을까. 색을 기억하는 순간까지만 주홍은 나의 것이 되어 줄 것이다. 우리는 색을 소유할 수 없지만 색의 기억은 가질 수 있으며, 우리가 기억하는 색들이 긴 밤 내내 제조할 꿈의 싱싱한 재료가 되어 줄 것이기에.

이혜미 시인 2006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보라의 바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