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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회 문건’ 사태를 돌아보며

2014년 12월 11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11층 특수 2부 조사실. ‘비선실세(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사건의 비틀린 프레임,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 수사가 한창이던 때다. 조사 시작 전 기자가 조심스레 노트를 펼치자 검사 표정이 뜨악해졌다.
검사 : “지금 뭐 하시는 건가요.”
기자 : “메모 좀 하려고요.”
검사 : “지금 조사받는 건데 적고 그러면 안 됩니다.”
기자 : “ 제 방어는 어떻게 합니까. 무슨 진술을 했는지
메모라도 해야.”
검사 : “글쎄, 안 됩니다.”

이날부터 크리스마스이브까지 이어진 세 차례 소환 조사. 매번 두툼하게 편철된 조서 속에는 ‘취재원 신원’을 둘러싼 헤아리기 힘든 많은 밀당이 담겼다. 수사 가이드라인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처벌이 목적이 된’ 수사 특성상 검찰은 사건을 요리할 틀을 짜놓는다는 게 정설이다. 따라서 치밀하게 준비한 함정 신문과 증거물을 쥔 검사 앞에서 기억에 의존해 일관되게 대응한다는 건 애초부터 힘든 게임이다. 어느 땐 내가 뱉은 엄연한 두 진실이 서로 충돌하는 기묘한 체험도 벌어진다. VIP급이 아닌 이상 변호인이 곁에 있을 수도 없는데 ‘무형의’ 수갑까지 채워놓으니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이른바 ‘십상시’ 신원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도 않은 보도 첫날 박근혜 정부 핵심 비서관·행정관 여러 명이 “명예가 훼손됐다”며 세계일보를 고소한 일도 그렇다. 검찰에서 출석을 통보하니 피소된 사실은 알겠는데 실제 고소한 이는 누구이고, 몇 개 사건인지, 병합인지 별개인지 알 길이 없었다. 조사 전 “고소장을 확인할 수 있느냐”고 묻자 “정보공개를 신청하라”라는 답이 돌아왔다. 보여줄 수 없을 뿐더러 열람·등사를 신청해도 “거부할 것”이란 싹을 자르는 통보였다.
검찰이 재작년 7월 일부 사건에 대해 ‘공소권 없음’ 처분한 것을 작년 8월에 알게 된 일도 있다. 정윤회 씨가 고소한 건을 ‘혐의 없음’ 처분한 통지를 받는 와중에서 1년 전 십상시 고소 건이 종결됐단 사실을 인지한 것이다. 검찰이 어떤 연유로 피의자와 변호인을 1년 넘도록 ‘눈 뜬 봉사’로 뒀는지는 알 길이 없다. 사실 이런 에피소드는 지극히 사소하다.
하지만 피의자 방어권과 변호인 변론권은 헌법이 정한 기본권이다. 형사사법 절차의 시작이고 전제이며, 그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인권’ 문제다. 작은 원칙, 작은 정의를 무시하는 이들에게 큰 원칙, 큰 정의를 논하고 기대할 수 있을까. “정윤회 사건 때 제대로 했더라면….”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 사태 속에서 많은 언론, 전문가들이 쏟아낸 이야기다. ‘비선 실세가 국정을 농단한다’는 언론의 폭로를 ‘권력에 눈 먼 일부 공무원이 허위 문건을 생산, 유출해 벌인 국기 문란’ 사건으로 종결해 낸 검찰 속성, 구조 등에 대한 지탄이다.
지금껏 검찰이 그 책임을 일부라도 인정, 반성하고 어떤 결단을 언급한 적이 있던가. 그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란 기대라도 할 수 있는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검찰은 늘 권력이란 고객의 인사이트까지 헤아려 처리할 것이다. 이를 견제할 소명을 받은 국회와 언론도 공익이 아닌 당리당략, 본질이 아닌 수사 속보를 좇으며 결국 기득권을 보호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사람을 청산 중일 뿐 이런 불행을 잉태한 우리 사회의 토양, 즉 시스템엔 아무런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6·13 지방선거가 여당 압승으로 끝난 만큼 정권의 적폐 청산 기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선거로 확인된 국민의 요구이기도 하다. 선봉에 선 검찰도 예외일 수는 없다. 정부는 검찰의 경찰 수사 지휘권을 폐지하고 경찰에 수사 종결권을 부여하는 수사권 조정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검찰 과거사위 활동이 본 궤도에 오르면 ‘검찰의 힘을 빼야 한다’는 여론은 한층 거세질 것이다. 반면 포털 댓글 조작 사건, 사법부 재판 거래 의혹 등 검찰이 정국 주도권을 쥘 수 있는 대형 사건들도 차곡차곡 쌓인다.
어느 정권에도 뚫린 적 없는 방패, 어느 정권보다 날카롭게 벼린 창끝이 일합을 남겨둔 셈이다. 어느 쪽이 치명상을 입을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후손들이 적폐 청산을 기록하며 구조 개선의 기회를 놓쳤다고 분석하는 일은 없기를 소망한다.









조현일 차장
●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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