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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피노(Kopino) 아이들

법원 조정실 앞, 작은 체구를 가진 70대 초반 가량의 남자가 홀로 앉아 있습니다. 세월이 느껴지는 손을 보니, 일생을 정직한 노동으로 살아오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얼굴형이나 입매 등이 누군가와 많이 닮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저 멀리 필리핀 세부에서 제 의뢰인이 보내준 사진 속 딸의 얼굴과 똑같습니다.
이 남자는 필리핀에서 일하던 중 제 의뢰인인 현지 여성을 만났고,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의뢰인을 두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연락처는 남기지 않았습니다. 의뢰인은 홀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아 막막하던 차에, 다행히도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현지 민간단체와 연결되어 한국에서 (사)한국여성변호사회를 통해 무료 법률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아버지를 상대로 하는 인지 및 양육비 청구의 소 진행 과정은 여의치 않았습니다. 먼저, 남자는 자신이 아이의 아버지임을 부인하였습니다. 이에 유전자 감정이 진행되어야 하는데, 아이가 한국에 오기는 불가능한 상황이었기에 감정인이 필리핀을 직접 방문하여 유전자 감정을 진행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유전자 감정 결과 친부(親父)임이 밝혀졌지만, 그다음은 양육비 지급 액수가 문제였습니다. 조정은 성립되지 않았고, 재산명시신청과 사실조회신청 끝에 화해권고 결정을 통해 과거양육비와 장래양육비를 포함한 일시금으로 소정의 액수를 지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필리핀에서 그 정도의 금액이라면, 아이가 성장할 때까지 경제적으로는 충분한 액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아버지를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아이에게 아버지의 빈자리가 메워질 수 있을까요.

현재 이 아이처럼 필리핀에서 이른바 ‘코피노(Kopino)’로 살아가는 아이들이 약 3만 명가량 된다고 합니다. 이 수치도 어디까지나 추정치일 뿐, 정확히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한국인 아빠로부터 외면당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다행히 조만간 여성가족부에서 코피노 아동의 실태 조사를 시작한다고 하는데, 실태의 심각성이 확인된다면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지원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일부 민간단체의 도움 없이는 한국에서 소송 자체를 진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빈곤의 악순환 속에서 자신의 부모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아버지이지만, 아이에게 아버지는 자신을 위해 한국에서 열심히 돈을 벌고 있는 자랑스러운 존재라고 합니다. 이러한 아이들을 위한 법적 지원을 통해, 우리 사회의 격(格)을 바로잡고 아이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보듬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의 온정이 어디까지 미칠지 궁금합니다.

 

 

 




이상희 변호사
●(사)한국여성변호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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