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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열어놓을 때 곳에 따라 비

녹음이 흐르나. 여름이 흐르려나. 묘지와 입술이 흐르나. 창문을 조금 열어놓은 사이
흐르는 것들. 사나흘이 흐르고 조각과 진창이 흐르고 창문을 조금 열어놓을 때 곳에
따라 비가 내리고 빗물이 흐르는 사이 너는 창문 앞에서 창문을 조금은 지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나. 창문을 열어놓을 때 너는 조금은 나갈 수 있었고 다시 조금은 들어올 수 있었고 너는 망설이고 있었고 그러는 사이 방이 흐르려나. 방이 흐르면 너는 놀라 밖으로 나갔다가 창문으로 숨으려나. 돌아볼 새 없이 방은 흐르고 사나흘이 흐르고 너는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않은 상태로 창문 속에서 머물고 있었다. 극장이 흐르고 있었다. 생몰이 흐르고 있었다. 곳에 따라 촌락과 강변이 흐르고 있었다. 때에 따라 갈곳이 흐르고 있었다. 갈 곳을 잃고 있었다. 너는 있었나. 너는 없었나. 너는 눈이 없었다. 너는 흐를 때 눈이 없었다.

나는 이 시를 지금 막 끝까지 읽고서 너는 흐를 땐 눈이 없었다, 라는 문장을 몇 번이고 반복해 목소리를 냈는데, 그 문장을 시의 끝에 계속 잇대어 끝나지 않는 시를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 너는 흐를 때 눈이 없었다. 너는 흐를 때 눈이 없었다. 너는 흐를 때…….   이 문장의 이미지를 곱씹으면서 앞에 나온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나는 어떤 덩어리가 되는 것 같고, 눈 코 입 없는 물체가 되어 흘러가는 것 같고, 그건 창문인 것 같고, 내 전경과 후경은 사라진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창문을 열어놓을 때 곳에 따라 비」는 근래 쓴 시 중 한 번씩 들춰보는 시이지만 사실 나는 이 시를 쓸 당시의 마음 혹은 이 시를 촉발한 계기나 과정에 대해서는 쓸 수 없다. 왜냐하면 잊어버렸기 때문인데, 나는 계속 잊어가고 있고, 잊어버리길 좋아하는 것 같고, 특히나 잊어버렸다고 말하길 좋아하고, 그렇게 말함으로써, 시에 대해서는 별달리 설명할 수 없다고 에둘러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봄에서 초여름 동안 이 시를 조금씩 써왔으며, 이따금 내 앞에는 흐른다는 이미지가 있었고, 흐른다는 말이 있었고, 어떤 리듬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시를 쓰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설명하기보다는 반응하기를 좋아하니까, 여기서부터는 다르게. 그러니까, 시를 읽다가, 나는 즉흥적으로 불을 껐고 다시 불을 켰고 창문으로 숨는 사람과 창문 주위로 떠내려가는 것들을, 눈보라와 산호초를, 이윽고 흐를 때 눈이 없는 사람을 떠올려보았고 나는 나를 눈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보려 했으나 그렇게 될 수는 없었으므로 눈을 감았다. 눈 감은 채 불을 다시 껐다. 주위는 다시 어두워졌고 눈을 떴고 시간이 조금 흘러 암순응한 눈을 나는 참지 못하고 다시 눈 감은 채, 또 다른 것들을 떠올려보았는데, 어느덧 나는 밝은 방에 있었다. 누구의 방인지. 방의 주인은 알 수 없고 다만 밝은 방. 방의 형태는 짐작할 수 없고 다만 밝은 방. 나는 밝은 방에서 눈 감은 채 있었고 하지만 너무나 잘 보여서 놀랐고 그랬으므로 방에서 나갈 수도 있었다. 여전히 눈 감은 채, 걸어 나갔는데 방은 사라졌나. 나는 계속 걸었고, 나는 다만 어디와 어디의 사이라는 기분만 들었고, 그렇지, 눈보라와 산호초 사이로군, 그 사이에서 걷는 것이로군, 이상하게도 눈보라와 산호초 사이 어디엔가 내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디라도 좋을 것 같았다. 그 찰나, 어떤 이미지, 한 소년의 이미지. 어떤 소년이 있었고 소년은 세면대에 물을 채운 후 얼굴을 넣고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숨을 참다가 얼굴을 다시 들었다. 투명한 물속에는 속눈썹 하나가 떠 있었고. 소년은 그 속눈썹을 건지려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할 것 같아서 세면대 물을 빼는데, 속눈썹마저 물과 함께 아래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소년은 망연한 표정을 짓다가, 손으로 멀쩡하게 눈꺼풀에 붙어 있는 자신의 속눈썹을 뗀 후 오랫동안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나는 그 소년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이상했고, 그런 이상한 생각을 하는 내 모습이 낯설기도 했다. 그렇게 걷다가, 밝은 곳에서 눈 감은 채, 이미지를 떠올리고 어떤 마음이든 생기도록 내버려 두다가도, 그 소년을 떠올리자 계속해서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무언가 떠올리기를 멈췄다. 읽던 시를 그만 읽었고 이제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안태운 시인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을 냈다.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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