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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미아나운서 인터뷰

다들 아시겠지만, 그래도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아나운서로 직장생활만 25년, 프리랜서로 8년, 총 34년간 방송 생활을 했고, 마이크를 잡은 걸로 치자면 초등학교 3학년 당시 방송반을 시작하여 총 47년간 방송을 해왔어요(웃음). 그리고 방송 외에 강의를 두 가지 정도 하고 있습니다. 제가 10여 년 전에 윤영미의 “열정”이라는 책을 썼어요. 다른 아나운서와 달리 저는 일명 금수저도 아니고, 흙수저로 시작해서 어려서부터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왔거든요. 그렇게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제 삶 자체가 남들에게는 흥미로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강의를 해달라고 요청이 많이 오더라고요. 그때 강의를 시작한 것이 꼬리를 물어, 현재까지도 제가 열심히살아온 삶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했던 노력들에 관한 재밌는 에피소드들이 많은데, 예를 들어 제가 고등학교 때 청량리역에 가서 역장님을 만나 제가 여기서 방송을 해보겠다고 해서 우리나라 최초의 지하철역 여자아나운서 역할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녹음기를 들고 당시 TBC 방송국에 가서 유명인들을 인터뷰하면서 어떻게 하면 아나운서가 될 수 있는지 물어보았던 일들도 있고요. 제가 성심여자대학교 국문과를 나왔는데, 성심여자대학교는 1년간 춘천에서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어요. 그때 1년간 춘천에 살면서, 춘천의 매력에 푹 빠졌고, 춘천 MBC 아나운서가 되어야겠다는 구체적인 목표가 생겼죠. 그래서 춘천 MBC에 무작정 찾아가 어떻게 아나운서가 될 수 있는지 여자아나운서에게 물어보았다가 퇴짜 맞고, 사장님께 10장씩 편지를 써서 읍소를 했는데, 다행히 사장님께서 제 편지에 감동하셔서 시험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어요. 당시 춘천에 거주하는 사람만 시험 응시자격이 주어졌는데, 저에게 기회를 주신 거죠. 그 편지 한 장이 제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때 편지는 사실 별 내용은 아니었는데 아마 제 진심과 열정이 통했었나 보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3명의 아나운서 중 제가 포함되어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춘천 MBC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의 스토리도 있는데, 제가 당시 이미 30살이었기 때문에 신입 아나운서로 공채 시험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해서 대통령 영부인에게까지 제가 왜 서울 MBC로 와야 하는지에 대해서 편지를 썼었어요. 그리고 답이 없어서 청와대로 찾아가기까지 했는데 당연히 못 만났죠(웃음). 그렇게 방법이 없어서 결국 포기하고 있을 때 91년도에 SBS라는 민영방송이 생겼고, 신입사원으로만 방송이 안 되기 때문에 처음으로 경력 아나운서를 뽑았습니다. 그때 저는 지방의 아나운서였고 KBS, MBC 아나운서들도 많이 지원을 했기 때문에 이력서를 내고도 큰 기대를 안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되었어요. 그렇게 겨우 SBS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누가 봐도 제가 꼴찌였기 때문에 TV 방송도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그 와중에 제가 점차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제 열정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방송을 7~8년을 하면서도 단 한 번도 지각하거나 결석한 적이 없고, 심지어 밤사이 눈이 내리면 혹시 늦을까봐 회사 책상에서 잤어요. 아주 작은 일을 맡겨도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그 정도로 저에겐 지독한 면이 있어요. 기계적인 성실성과 지금 상황에 대한 감사함 그런 마음이 컸기 때문에 지금 이미지 형성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우리나라 최초, 어쩌면 세계 최초일지도 모르는 여자프로야구캐스터를 했어요. 이건 제가 정말 야구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단순 방송을 오래 하고 싶고, 전문성을 기르기 위해서 시작하게 된 것인데요. 야구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매일 공부하고, 훈련하고, 잠실 야구장에 가서 직접 보고 또 훈련하면서 당시 살이 10kg 가까이 빠질 정도로 힘들었는데, 회사에서 인정을 해줘서 제가 6년 정도 야구 중계를 했죠. 또 예능 프로그램에서 최초의 아나테이너로 방송에서 춤추고 노래 부르고 그런 노력을 했고요. 그런 삶을 “열정”이라는 책으로 쓴 건데, 그 이야기를 강의해달라고 해서 강의를 시작하게 된 것이고, ‘어떻게 하면 말 잘하는 것이 아니라, 잘 말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책(*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을 쓰면서, 이 내용에 대한 강의 요청이 있어서, 이렇게 두 가지 강의를 하고 있어요.

 20년간 아나운서, 직장인의 위치에 있다가 프리랜서로 전향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아요?
사실은 굉장히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습니다. 마흔이 넘으니, 여자 아나운서로서의 입지가 굉장히 좁아지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 여자가 커리어 우먼으로 살기가 굉장히 어렵잖아요. 자식 키우면서 엄마 역할, 아내 역할, 며느리 역할, 회사원으로서의 역할까지 다 해내기가 굉장히 힘든데, 그러면서도 또 남자와의 경쟁에서 공정하지 못하고, 나아가 여자들 사이에서도 공정하지 못해요. 젊었을 때는 외모가 발목을 잡았어요. 왜냐하면 다른 분야보다 아나운서 세계는 외모로 평가를 많이 받거든요. 외모에 의해서 프로그램을 맡고 못 맡기도 하고, 외모를 점수화해서 평가받아요. 저는 외모가 뛰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불합리성을 많이 느꼈어요. 방송과 능력으로만 평가받지 못하고 외모로 평가받으니까요. 사실 뉴스를 하면 전달력과 지적 능력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마흔이 넘어 이제 외모가 평준화가 되니, 나이가 발목을 잡더라고요. 방송하는데, 뉴스를 하는데 무슨 나이가 필요할까요? 그렇지만 여자 아나운서가 마흔이 넘으니 조로하면서 할 프로그램이 별로 없어지고, 교육 쪽을 맡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제가 방송을 하고 싶어서 아나운서가 된 거지, 후배들 교육을 하려고 아나운서가 된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 불합리성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가 마흔이 넘으면서 현실을 직시하게 되고, 정년까지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점차적으로 준비를 하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제가 나이 마흔이 넘으니 아나운서 생활보다 다른 분야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비로소 사회생활이라는 걸 시작했어요. 제 분야와 전혀 다른 패션, 뷰티, 그 밖의 분야의 사람들과 모임을 갖고요. 그때부터 제 시야가 넓어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넓어진 것 같아요. 그러면서 여러 가지 제의가 있었는데, SBS라는 직장이 너무 좋은 직장이어서 도저히 제 발로 못나가겠더라고요. 그래서 7~8년간 고민을 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다가, 마흔 후반이 되면서 제 이름을 걸고 홈쇼핑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만 방송을 해도 월급의 몇 배를 받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종편이 생기면서 기회가 더 많아져서 내가 나가서 일해도 월급만큼은 벌 수 있겠다는 확신과, 강의 요청이 많아지는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이 더 많아지겠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더 늦기 전에 나가야겠다며, 오십을 눈앞에 두고 그만두었습니다. 오십 넘으면 체력도 떨어지고, 용기도 떨어진다고 해서 정말 마지막으로 결단을 내린 거죠(웃음). 저는 프리랜서를 하면서 인지도가 더 많아진 것 같아요.

직장인과 프리랜서 각 어떤 장단점이 있을까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직장인들은 KTX를 표를 사서 앉아서 가는 것이고, 프리랜서는 창밖에서 뛰어가는 것과 똑같아요(웃음). 저 같은 경우는 생활비를 직접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열심히 뛰었지만,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면 프리랜서가 좋아요. 직장 생활을 할 때에는 자유를 그리워해요, 그런데 프리랜서를 해서 자유를 잡으면, 그게 더 이상 자유가 아니라 불안이 되어요. 직장 생활에는 권태를 느꼈지만, 프리랜서는 결국 불안인거죠. 직장인은 중간을 갈 수 있지만, 프리랜서는 아주 잘되거나 아주 안 되거나 극단적인 둘 중 하나니까요.

현재 연년생 두 아들이 아주 바르고 훌륭하게 자랐다고 알고 있는데요, 바쁘게 일하시면서 어떻게 일과 육아를 그렇게 잘 병행하셨나요?
저는 자유방임으로 아이들을 키웠어요. 저는 참견하거나 아이들에게 YES or NO로 이야기하거나 이래라저래라 아이를 이끌어가지 않았어요. 지켜봐 주고, 잘못되지 않게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놔두었을 뿐이에요.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이거 해라 저거 해라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하지도 않았어요. 제가 사회생활 해보니까 공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꿈을 이루기 위한 학벌만 있으면 되는 것 같아요. 그게 꼭 서울대이거나 하버드대일 필요는 없죠. 내가 피디가 되고 싶으면 4년제를 졸업하면 되고 변호사가 되려면 꼭 대학을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목표”는 자신이 세우게 놔두고, 저는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저는 아이들의 성적표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침에 깨운 적도 없고요. 아이들 말을 100% 믿어주고, 아이들의 선택도 믿어주고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이의 행복에 초점을 맞춰서 대화를 많이 하다 보니, 아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서 대화를 많이 나누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경험을 많이 시켜주었을 뿐이에요. 그리고 지금 시대는 공부 잘하고, 돈 많은 것보다 “호감”을 얻는 사람이 성공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호감 가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 노력했죠. ‘사람들을 만날 때 벽을 두지 마라’,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여행을 아주 많이 다녔고, 한글을 모를 때부터 매주 토요일마다 도서관을 다녔고요. 그리고 패션, 문화, 예술에 대한 경험을 많이 시켜줬어요. 공연, 전시, 아주 트렌디한 카페, 식당도요.

첫째 아이가 지금 카투사에 군 복무 중인데 인기가 많아요. 왜 인기가 많냐고 물어봤더니, 음악, 영화, 책, 건축, 사진, 패션에 대한 경험을 많이 하다 보니, 그런 데에 식견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어느 누구를 만나도 대화가 되고, 대화의 콘텐츠가 많다 보니, 사람들이 제 아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거죠. 그래서 그런 경험을 하게 해준 엄마한테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아무리 대기업의 CEO라고 하더라도, 그 전문적인 식견 외의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고, 그게 바로 문화, 예술, 인문학 등의 식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자기 분야 외의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콘텐츠가 있는 거잖아요. 저는 집에 어른들이 찾아와도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어른들의 대화에 참여하게 했어요. 어른들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게요. 이제는 제 후배들과 저 없이도 만나기도 하더라고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과 대화하는 법을 익히다 보니, 어른들 앞에서 대화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두려움이 없고 당당해요.

여자 변호사들도 전문직임에도 불구하고 커뮤니티에 보면, 출산 및 육아 때문에 일을 그만두려고 고민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조언 좀 부탁드립니다.
절대 그만두면 안 돼요! 어떻게 애들 때문에 자기 일이 좌지우지됩니까. 일단 자기 일이 최우선이어야 해요.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들이 행복하지, 엄마가 불행하면 아이들도 불행할 수밖에 없어요. 너무 밀접한 관련이기 때문에 당장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들어가면 당분간은 좋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좋을 수 없습니다. 변호사가 되기까지 노력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이루고픈 꿈이 있다는 거고, 그걸 이루기 위해 그만큼 노력했다는 것인데, 전업주부가 된다면 결코 만족하지 못해요. 아이가 엄마를 원하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아요. 처음에는 울고불고 엄마를 찾으면 ‘내가 왜 여기 회사에 나와서 이러고 있나?’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죠. 하지만 왜 여자만 그만두어야 하나요? 그건 아니죠. 월급 버는 걸 보육비 등으로 전부 지출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결국 아이도 나중에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자기 일을 가지고 열심히 사는 엄마를 더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의 뒤통수를 보면서 자라요. 우리 엄마가 매일 누워서 드라마만 보는 뒤통수인지, 엄마가 매일 열심히 일하면서 전문적으로 자기 일을 하는 뒤통수인지 아이들은 보고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제가 일일이 돌봐주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알아서 했어요. 단 한 번도 속 썩인 적도 없고요. 전 정말 아무것도 해준 게 없고요. 첫째 아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안 하겠다고 해서 알겠다고 하고 일주일만 생각을 해보라고 했죠. 그랬더니 다시 대안학교를 가겠다고 해서 알겠다고 하고 잘 알아보라고 했죠. 이번엔 또 미국으로 유학을 가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럼 비자를 한번 내보라고 했죠. 그랬더니 둘째가 따라간다 그래서 아이들을 같이 뉴욕에 있는 고모 집에 보내고 근처의 크리스천 사립학교를 보냈는데 3~4개월부터는 학교에서 전교 1~2등을 했어요. 졸업도 그렇게 했고요.
 

 여성이 힘든 만큼 남편들의 역할이 중요한 것 같아요. 다른 매체 인터뷰를 보니, 남편분께서 자상하시고 많이 도와주시던데요?
도움받은 게 아니라, 당연한 거예요. 집안일을 반반씩 하는 건요. 제 남편은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제가 경제적인 가장 역할을 하고 있거든요. 저보다 시간도 많고요. 그러면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저는 일을 하면서 집안일을 다 못해요. 그런데 많은 여자들이 일을 하면서도 집안일, 육아까지 전부 하려고 하거든요. 그것에 막 죄책감까지 느끼면서요. 여자가 신도 아니면서 왜 그래야 해요? 저는 당연하게 시간이 있는 사람이 청소하고 집안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고맙거나 미안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이 일을 할 때 혼자 완벽하게 해내려고 하지 말고, 식구들에게 분담시켜야 해요. 남편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요. 서로 맞추어가야 합니다. 유명한 요리사들도 다 남자잖아요(웃음).


주위에서 변론기일에 법정에서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변호사들을 많이 보았어요. 논리적으로 말하는 노하우가 있을까요?
아주 쉬운 방법은 “결론-본론-결론” 이 순서대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서론이 길면 일단 사람들은 듣지 않아요. 결론부터 이야기하고, 그다음에 스토리나 에피소드 식으로 이야기하고, 다시 결론을 얘기하면 더 잘 들려요. 이야기를 100을 하면, 듣는 사람들에게는 30 밖에 안 들린다고 해요. 그 30도 채 못 듣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잘 듣게 하려면, 일단 쉽게 이야기해야 하고, 간략하게 이야기해야 하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해야 해요. 그리고 “결론-본론-결론” 잊지 마시고요.
그리고 또 중요한 게 바로 비언어에요. 눈빛, 제스처, 걸음걸이, 태도, 옷차림 같은 비언어가 어쩌면 더 중요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보폭도 당당하게 걷고, 상대방과 눈빛도 마주쳐야 하고, 자세도 곧게,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서 내가 제일 잘 안다는 배짱 있는 태도도 갖춰야 합니다.

그리고 변호사들도 직업상 맞춤법을 틀리면 신뢰가 많이 떨어지잖아요. 사람들이 흔하게 틀리는 맞춤법들에는 뭐가 있을까요?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바뀌었어요”라는 말을 쓸 때, “바꼈어요”이런 말은 없어요. 그리고 불필요한 리을을 많이 쓰는 경우가 있어요. “몰르겠어요”가 아니고, “모르겠어요”, “잘려고”가 아니고 “자려고”, “할려고”가 아니고 “하려고”가 맞고요. “그릴려고”가 아니고, “그리려고”가 맞습니다. 그리고 “하지 않아요”라고 할 때 받침을 니은으로 할지, 니은, 히읗으로 할지 고민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럴 때 앞에 “-지”가 오면 뒤에 받침으로 니은, 히읗을 쓴다고 생각하면 쉬워요. 그리고 “아니”라고 해서 말이 되면 “않”이 아니고 “안”이에요. 또 “데”와 “대”의 차이는 “데”는 내가 주체가 될 때고, “대”는 3인칭이 주체가 될 때가 많아요. 들은 것을 전할 때는 “대”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봬요”와 “뵈어요”는 있는데, “뵈요”라는 말은 없어요.

아나운서도 직업병이 있나요?
너무 많죠. 우리는 라디오 뉴스를 의무적으로 하루에 한두 개 정도하니까요. 그래서 강박관념 같은 게 있어요. 혹시 자기 뉴스를 까먹을까 봐요. 그래서 저는 알람을 막 몇 개씩 해두었어요. 저는 프리랜서가 된 지금도 그 강박관념이 남아있어서, 악몽을 꾸면 뉴스에 늦어서 헐레벌떡 뛰어가는 꿈, 계단을 뛰어가고, 뉴스 원고가 없고 그런 꿈을 꿔요. 나로 인해서 회사에 문제가 생기는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요. 물론 저는 뉴스를 펑크 낸 적은 없습니다(웃음).

그리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 사람이 틀린 말을 하면, 그게 순식간에 필터링이 되면서 그렇게 괴로워요. 막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말하자니 잘난 체 같고, 말하지 않으니 제가 두드러기가 날 것 같은 심정 이에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저는 일은 80살 까지 하고 싶고, 연기도 좀 하고 싶어요. 제가 연극도 했었거든요. 그리고 개인적인 꿈은 1년씩 다른 지방이나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어요. 부산에서도 1년, 제주도에서도 1년, 도쿄에서도 1년, 베를린에서도 1년, 그렇게 5~6년 정도 방랑자처럼 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저는 34년을 일주일 이상 쉬어 본 적이 없거든요. 돈이나 강박관념 없이 자유롭게 노래도 부르고, 길거리에서 춤도 추고, 60살 넘어서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요.

● 인터뷰/정리 : 정지원 본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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