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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 변호사 인터뷰

양육비이행관리원 원장으로 3년 넘게 재직하셨는데요, 양육비이행관리원이 하는 구체적인 역할과 업무는 어떤 것인가요?
제가 양육비이행관리원 초대 원장으로 2015년 3월 25일에 취임을 하고 2018년 3월 24일이 임기만료일인데 두 달 정도 더 일하게 되어 금년 5월 말에 퇴임하게 되었습니다. 양육비이행관리원은 쉽게 말하면 이혼한 한부모 또는 미혼의 한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 데 필요한 양육비를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에 양육비 채권자와 채무자를 중재해서 양육비를 받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독립된 child support agency가 잘 갖추어져 기관이 직접 양육비를 받아주는 선진국보다는 미흡하지만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서 중재를 해서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직접 지급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입법 미비 등으로 양육비 지급을 실효성 있게 강제할 수단이 부족하고 민사집행법이나 가사소송법에 근거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지급하는 비율이 20%밖에 안돼요. 80%가 못 받고 있다는 거죠. 미성년 자녀 입장에서는 부모를 자신이 선택한 것도 아니고 이혼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양육비를 지급받지 못하면 양육, 보육, 교육 등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남들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어요.

제가 1994년에 법원에 있을 때 사법제도 시찰로 유럽을 20여 일 정도 돌았는데 그 중 1주일을 뮌헨에 있었어요.
그런데 독일은 이혼을 하면 엄마가 체인징 파트너를 하면서 살아도 아이들은 큰 문제없이 잘 크는 것 같더라고요. 어떻게 된 거냐 물었더니 독일 아이들은 자신이 만 18세가 되면 나가서 독립해야 하는 걸 아는데 엄마가 그러든지 말든지 내 인생은 내가 챙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국가에서 학비가 없으면 학비를 대주고 집이 없으면 집도 30년 할부로 해주니까 부모가 이혼을 해도 청소년 문제가 우리만큼 심각해지지 않는 거죠.

우리나라는 양육비 지급도 제대로 안되는 현실에서 주류에서 밀려난 아이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죠. 저는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느끼고 저출산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신경을 쓰는데 이미 태어난 아이들에 대해서는 왜 관심이 없냐고 강하게 호소를 해왔어요. 그때부터 지속적으로 이야기했더니 양육비이행관리원 초대 원장으로 등 떠밀려서 가게 된 거죠(웃음). 처음 양육비이행관리원에 부임하고 보니 안되는 게 100가지고 되는 게 1가지인 열악한 현실에서 어떻게든 쫓아가서 만들어내는 그런 역할을 하게 됐어요. 아무도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야 되고 전체 그림을 보면서 실시간으로 일을 진척시켜야 하는 게 어려웠는데 그래도 직원들이 자신의 일을 참 자랑스러워하고 보람 있어 하면서 잘 따라와 줬어요.

 양육비 지급 이행을 관리하는 별도의 기관도 있고 최근 “배드 파더스”라는 사이트에서 양육비를 주지 않는 전 배우자의 실명과 신상을 공개해서 화제와 논란이 될 만큼 양육비 지급이 현실에서는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나요? 실효성 있는 양육비 지급 이행을 위해 어떤 대책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말씀드렸듯이 양육비 지급과 관련하여 아직 우리 현실은 멀었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양육비 채권채무를 민사 채권채무와 같은 틀에서 보기 때문에 그래요. 양육비 채권채무는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봐야 합니다. 아이가 무슨 책임이 있습니까? 아이가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잖아요. 양육비 지급은 아이의 기본적인 인권을 지키는 것 입니다. 다시 말해 이 아이가 먹고사는 데 꼭 필요한 돈이라고 하면 모든 채권에 우선되어야 해요. 그런데 이걸 일반 민사 채권채무와 동일하게 보는 것이 현재의 법과 제도에요. 다행히도 지금 파산법원에서는 실무에서 최우선으로 양육비 채권을 고려해주고 있는데 너무 감사해요. 법은 아직 그대로인데 우리가 계속 애로사항을 이야기 했더니 파산법원이 금년 1월 1일부터 양육비를 다른 채권보다 최우선으로 지급하도록 하고 있어요. 실무에서 앞서가고 있는 거예요. 우리 법원이 하는 역할이 굉장히 중요해요. 실제로 개인 회생·파산을 하는 아버지라도 아이에 대한 조금의 정만 있으면 몇만 원이라도 줄 수 있거든요. 그렇게 되어야 그 아이나, 키우는 엄마는 아빠가 아이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마음을 버릴 수 있고 아이입장에서도 커가면서 ‘아빠가 나를 버렸네.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걸. 내가 태어나서 엄마를 고생시키네.’ 이런 죄책감을 털어버리면서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만 단지 돈이 없는거구나.’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죠.

아이를 혼자 키우는 엄마가 굉장히 열악한 처지에 있는게 현실이기 때문에 아이의 기본적인 인권을 지킨다는 생각에 집중해서 들어가 보면 그것을 최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도 이의제기하지 못할 거예요. 선진국은 이미 그렇게 다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호주나 뉴질랜드는 국가에서 알아서 양육비를 받아 줍니다. 아이 양육비를 안주면 보통 시민으로서 살 수가 없습니다. 자영업자의 경우 양육비를 안주면 사업장을 경매에 부쳐버리고 양육비를 제외한 나머지만 돌려줘요. 그런 제재가 있으니 시민들에게 양육비는 최우선으로 줘야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는 거예요. 반면 우리는 제도도 미비하지만 아직도 ‘누가 이혼하랬어? 누가 애를 낳으랬어?’ 이런 잘못된 관념이 많아요. 저는 아이 쪽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자는 거죠. 부모 입장에서는 이혼할 수 있어요. 혼인 전에 애를 낳을 수도 있고요. 그런
모든 형태를 가족으로 품어야합니다. 아이가 부모가 이혼했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소외되고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채로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소외되어 그늘에서 자라게 하면 결코 우리 사회를 좋은 사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으로 품으면 사랑으로 돌아옵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어려움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때 실마리가 보입니다. 정책 담당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 구성원들이 더 노력해 줬으면 합니다.

정책과 관련하여 한 가지만 이야기해보면, 양육비의 경우 채무자 동의 없이 재산조회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법 개정안을 냈는데 그걸 여성가족부에서 한시적 긴급지원 만으로 축소했더라고요. 그래서 임금채권은 체당금까지 주면서 보전해주는데 아이들은 왜 보호해 주지 않냐고 국회에 가서 항의했더니 그것도 우리 안대로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어요. 그런데 입법보좌관이 내일까지 외국사례를 좀 조사해서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날 스무 명 정도 되는 변호사들과 밤을 새우고 조사해서 다음날 10시에 자료를 가져갔어요. 법안소위에 올리고 “원안대로 가결되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듣는데 우리 이행관리원 부장이 우는 거예요. 그런데 눈물이 진주방울 같아요. 입은 웃는데 눈은 울고 있고(웃음). 법이 잘못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걸 바꾸기 위한 작은 물꼬라도 텄다는 생각에 너무 좋은거죠. 함께 고생한 변호사들을 불러서 밥을 사주는데 하는 이야기가 그래요. “원장님 정말 너무하다. 이걸 밤새워서 어떻게 해?”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하면 되는구나. 무조건 쫓아가서 노력하면 안되는게 없구나.”라고 생각을 바꾸게 됐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게 바로 상이다.”라고 했죠.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들은 불안하고 힘든데 그걸 끌고가는 선배가 있다는게 중요한거 같아요. 그렇게 서로 웃고 격려하면서 했어요.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서 제가 나올 때까지 양육비를 320억 받아줬어요. 1년에 100억씩, 한 달에 10억씩 받아준거죠.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한 달에 10만 원, 20만 원이라도 받으면 그걸 붙잡고 아이를 시설에 보내지 않고 살아보자고 하니까 양육비는 아이가
살아가는 데 마중물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잘 알았으면 합니다.


아동·청소년 인권에 방점이 있으신 것 같은데 관심의 계기는 무엇인가요?
제가 1980년에 가정법원에 갔어요. 그런데 가서 보니 이혼의 최대 피해자는 아이들인 거예요. 부부가 아니에요. 이혼하고 엄마나 아빠가 혼자 키우는 아이들은 엄마나 아빠가 생계를 위해서 직장에 나가니까요. 이런 경우도 봤어요. 성년인데 김치를 못 먹어요. 우리나라 사람이 김치를 못 먹는 게 너무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물어보니 이혼 후 엄마가 생계를 위해 직장에 나가느라 밥을 못해주고 맨날 돈만 주면서 사 먹으라고 하니까 김치를 먹는 식습관이 전혀 형성이 안된 거예요. 그런 작은 사례들도 보면서 이혼의 피해자는 아이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혼 가정 아이들을 어떻게 잘 키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집중을 했죠. 또 저는 문제있는 소년은 원래부터 그런가보다 했는데 소년사건을 맡아보니 결론적으로는 사랑에 굶주린 춥고 외로운 아이들이 있는데 부모들이 필요한 시간에 아이들한테 사랑을 주지않아 그렇게 된 거예요. 문
제 소년이 아니라 문제 부모가 있는 거예요. 부모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서 그랬다고 항변하는데 아이들이 너무 불쌍하더라구요. 그래서 이래서는 안된다. 우리 아이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속 이야기를 했었죠.


법원에 25년 정도 재직하셨는데요, 법조인의 꿈을 키우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제가 어릴 때 1950년대 말 60년대 초 그 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판사이신 황윤석 판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분이 돌아가신 이야기가 많이 회자 되었죠. 나중에 보니까 그분이 제가 졸업한 진명여고 대 선배님이시기도 하고 은사님의 제자이시기도 했어요. 처음 황윤석 판사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런 것도 모르는 상태였는데 어른들께 물어봤어요. “판사가 뭐하는 거예요? 여자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랬더니 어른들께서 “판사는 이러이러한 직업이고 굉장히 좋은일을 하는 사람이다. 여자도 할 수는 있는데 그게 고등고시를 패스해야 돼서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워. 감히 꿈도 꾸지 말아라.” 이런 식으로 답을 하셨어요. 아마 어른들은 제가 판사에 진지하게 관심이 있다는 생각은 못 하셨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 나도 판사하면 안돼요?” 그러고 기도했어요(웃음).
결론적으로 판사가 됐어요. 그래서 참 어릴 때 하나의 꿈을 가진다는 것은 굉장한 일인 것 같아요. 부모가 되어보니 아이들을 위해 꿈을 꾸면서 기도하는 게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믿어 주고 기다려 주고 기도해 주는 그런 부모. 그럼 아이는 부모가 나를 사랑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꿈을 꾸고 그 꿈을 펼치는 거예요. 그게 부모로서의가장 큰 책무가 아닐까 해요.


법원에 계실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면?
제가 2000년 서울 중앙지방법원에 있을 때 친일파 후손이 민사소송을 제기했어요. 국가 상대로 자신의 선조 명의였던 부동산을 돌려달라는 것이었는데 저는 헌법전문의 ‘3·1 정신을 계승하고’라는 문구를 인용해서 각하를 했어요. 결과적으로 이 판결을 계기로 해서 친일파 재산환수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것 같아요. 우리나라를 빼앗고 망가뜨리는 데 적극 협조한 대가로 받은 재산을 후손들에게 주는 것은 정의에 반한다는 생각이었어요.


변호사로 개업하신 후 특정 로펌에 소속되지 않고 여러 가지 위원회 활동을 하신 경력이 눈에 띕니다.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의 첫 인권보호관이시기도 하셨고요. 이런 점들을 보면 변호사 활동을 하시면서 특별히 생각하는 신념이나 가치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로펌을 운영한다고 하면 그건 비즈니스거든요. 그럼 수익과 손실 그리고 비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하면 때로는 제가 양심을 조금은 굽혀야 되는 부분도 있을 수 있어서 저는 검소하고 조금 가난하게 살겠다고 생각하면서 정말 도와줘야 될 사람만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남편 표현에 의하면 일은 열심히 하는데 돈은 많이 안 벌어온다고 우스갯소리로 그러더라고요. 위원회도 수당 정도니까 크게 돈이 될 것은 없죠. 그러나 기본적으로 부족한 내가 이 사회에 쓰여진다는 게 감사하고 이걸로 세상이 한 단계 레벨업 된다면 감사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부차적으로 돈이야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만 있으면 되고 명품 걸치고 우쭐거리고 사는 거보다 소리 없이 깊이 흘러가는 바닷물처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도 귀한 삶 아니겠는가.
돕고 싶은 사람 돕고 살 수 있어서 좋고 작은 사무실을 하니까 비즈니스를 할 필요가 없어서 운신의 폭이 넓었다고 할까요?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하니까 약지는 못하죠. 그 대신 열심히 아껴 써요(웃음).

북한이탈주민센터 인권보호관은 당연히 통일 문제에 관심이 있었는데 기회가 닿아서 맡게 되었어요. 당시 탈북민 조사 과정에서 인권침해가 있다는 문제가 많이 제기돼서 인권보호관이 생겼어요. 해보니 제일 어려운 게 탈북민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살던 사고방식 때문에 자본주의 삶을 잘 모르는 게 너무나 큰 어려움이었어요. 언어나 표현방식도 소통이 잘 안되고 컴퓨터도 못하고. 그래서 시설에 머무는 동안 적응할 수 있는 교육을 받고 나갈 수 있도록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들의 삶이 어떻게 나아질 수 있는지 고민도 많이 했고. 우리 동포로써 어떻게
하면 잘 받아들일 수 있을지 노력을 했다는 점에서 좋은 경험이었어요.


배우자(故이해봉 前국회의원)께서 정치인이셨고 변호사님도 공직에서 판사로 바쁘게 살아오셨는데요, 아이들 키우는데 애로사항은 없으셨나요. 정치인 배우자로서의 대외활동도 매우 바쁘셨을텐데요.
저는 친정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시어머니께 부탁드리려고 했는데 그것도 안돼서 아이 키워주시는 분을 고용했죠. 그분들 때문에 정말 마음고생 많이 했어요. 그분들에게 제가 슈퍼 을이었는데 정말 잘해드렸던걸 생각하면... 시어머니께 그렇게 했으면 저 열부상 받았을 거예요(웃음). 나중에는 할 수 없어서 혼자 계신 친정아버지께 부탁을 드렸어요. 아이 봐주시는 분은 제가 계속 고용할테니 아이들을 정서적으로만 잘 붙잡아달라고 말씀드렸어요. 난색을 표하시는 것을 억지로 모셨는데 정말 친정아버지가 엄마 역할 아빠 역할 하시면서 지극정성으로 케어 해주셔서 아들 둘을 키울 수 있었어요.
저도 아무리 바빠도 아이들이 배드민턴 하러 나가자고 하면 다 해주고 훌라후프든 야구든 아이들이 원하는 건 다해주려고 노력했어요. 그런 노력 때문인지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어 잘 커준 것 같아요.

정치인의 배우자로서 저도 직업이 있으니 전적으로 거기 매달릴 수 없었지만 그래도 집중해서 대부분의 일정들을 소화 했어요. 민원상담도 해주고 지시도 하고 정리도 하고. 법조인을 하면서 얻은 사회경험과 사람들을 상대했던 그런 경험이 거름이 되서 다 활용이 되더라고요. 그리고 남편이 저를 전적으로 믿어주고 하니까 고마웠죠. 부부간에 서로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게 필요한 거 같아요. 어렵기는 하지만 정치인으로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선택과 집중을 해가면서 최선을 다해 도와드렸어요. 국회의원이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고되고 어려운 일이에요. 배우자 되는 사람들은 자기가 연꽃의 진흙뻘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연꽃을 피우도록 최선을 다해서 도와줘야 그나마 제대로 국회의원 노릇을 할 수 있지 보통의 생각으로 해서는 자꾸 발목을 잡아서 운신의 폭이 좁아져요. 최대한 자유를 주면서 경제적인 어시스트까지 하면 베스트죠. 쉽지는 않지만.

 앞으로의 꿈이 있으시다면?
양육비이행관리원이 자리를 잘 잡아서 우리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선진국은 child support agency라고 해서 모든 부처가 협조하여 아이들을 잘 키우는 데 지혜를 모으는 그런 독립기관으로 자리 잡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독립 기관이 아니라 여성가족부에 속해 있고 그래서 전자소송도 안돼요. 양육비이행관리원을 통해 전자소송도 되고 양육비이행관리원이 독립된 기관으로서 양육비 정책 전체를 아우를 수 있게 만들어서 우리 아이들을 잘 키우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그런 기관으로 발전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후배 변호사님들께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변호사들이 미국처럼 각계각층으로 다 퍼져서 우리나라 법치주의가 뿌리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변호사가 되면 고생을 하더라도 검소하게 살겠다는 생각을 하고 배운다는 겸손한 자세로 10년만 죽자고 노력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가 생길 거예요. 그 분야의 블루오션을 찾아서 계속 노력하여 최고 전문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야돼요. 물론 그런 기회를 찾기가 어렵긴 하죠.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꿈이 ‘이 세상을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데 내가 무슨 역할을 할 것인가’가 돼야 해요. 돈 벌어서 나만 잘 먹고 잘 살겠다 이런 생각은 조금 비우고. 변호사는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직업은 아니잖아요. 돈에만 집착하면 세상과 타협하게 되고 그럼 위험하죠. 조금 외롭고 힘들고 고되더라도 자기 마음속에 브레이크를 걸고 ‘최소한 이거는 지킬 거야.’ 라는 생각을 가지셔야 합니다. 돈만 좇지 말고 내가 남과 다른 게 무엇인지 다른 시선으로 보고 더 노력하고 잘하는 분야가 있으면 차별화하고 특화에 집중하면서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다른 사람들 시선을 의식하고 살면 안되고 내 페이스대로 살면 돼요. 허위의식, 비교의식, 상대적인 박탈감을 가지고 자신을 괴롭히지 말고 ‘나는 나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노력하면 할 수 있어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체력을 기르고, 가족간 유대를 돈독히 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갖길 바랍니다.

인터뷰/정리 : 김승현 본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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