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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념 - 무죄추정의 원칙

무죄추정의 원칙

 

형사사건을 변호하러 법정에 갔다가 앞 재판이 길어져 재판을 방청하게 되었습니다. 성추행 사건 같았는데, 재판장이 공소사실에 대한 의견을 물었고, 피고인은 ‘술에 취하여 자고 있었기 때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피해자가 성추행을 당했다고 한다면 내가 다 잘못했다.’라는 취지로 진술하였습니다. 재판장은 “술에 취하여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라고 되물었고, 피고인은 “그냥 다 인정하겠습니다.”라고 답하였습니다. 재판장님은 다시 한 번 “조서에는 ‘술에 취하여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고 남길까요? 그렇다면 제가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피고인은 재판을 받는다는 것에 부담을 느낀 것인지 “피해자가 말한 대로 인정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재판장은 아쉬워하며 공소사실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재판을 종결하였습니다.

 

그 다음 사건이 제가 변호하는 사건이었는데, 피고인만 15명인 사건이었음에도 재판장은 지방에서 올라온 피고인들을 배려하여 한 명 한 명에게 지방에서 재판을 받고 싶은지를 물으며 불편하지 않도록 변론을 분리하여 관할법원으로 이송하여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게다가 제가 변호하는 피고인과 상피고인 간의 대면을 피해야 할 상황이어서 변론분리신청서를 제출하고 피고인은 불출석하였었는데, 재판이 끝나고 피고인들이 나갈 때까지 아무런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OOO 피고인에 대한 변론분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재판장은 “피고인들이 모두 나가고 말씀하시죠.”라고 하시며, 어느 피고인과 재판을 받을 수 없는 것인지 묻고 피고인의 의사대로 공판기일을 지정해주었습니다.

 

피고인 한 명, 한 명에게 전화번호를 물어 불필요하게 법정에 출석하지 않도록 전화 할 테니, 02-530으로 시작하는 번호가 있으면 전화를 꼭 받으라고 하는 판사라니. 저는 그 날의 재판 진행을 보면서 저것이야 말로 무죄추정의 원칙이 실현되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범죄자임을 단정하지 않고, 방어권을 충분히 보장해 주는 것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같았습니다. 두려움에 고개도 못 드는 피고인이 유리한 진술을 하도록 돕고, 피고인이라도 최소한으로만 법정에 출석할 수 있도록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으며, 피고인의 상황과 이익을 최대한으로 고려하는 공판은 형사사건을 수차례 진행해왔던 저에게도 생소한 풍경이었습니다. 

 

최근 법원에 대하여 막말 판사나 황제노역처럼 부정적인 면들이 세간에서 회자되고 있지만 법정에서의 긍정적인 한 장면이 제게는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이 원칙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그 날의 법정에서처럼 실체를 가지는 원칙이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신가현 변호사
변호사시험 제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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