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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변호사 인터뷰

한국 현대사의 굴절 속에서 인권 옹호라는 변호사의 사명을 초지일관 실천해 오신 변호사들 중 대표적인 분으로 손꼽히는 한승헌 변호사님. 4월호에서는 젊은 법조인들이 사표(師表)로 삼아야 할 한승헌 변호사님을 만나 60여 년 변호사 생활에 얽힌 보람과 어려움, 후배 변호사들이 가져야 할 자세, 최근의 사법농단 사태에 관한 견해 등을 들어 보았다.

 

먼저 근황을 여쭙고 싶습니다.
건강의 하향곡선을 의식하면서 그런대로 일과를 메꾸어가고 있지요. 간헐적으로 엄습하는 무기력도 “나이 앞에 장사 없다”라는 명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간혹 나이를 묻는 사람에게는 “태어난 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숫자를 잊어버렸다”고 둘러댑니다. 건강을 묻는 사람에게는 “나이만큼 건강합니다.”라는 모범답안을 들려줍니다.

1998년 가을에 감사원장을 정년 퇴임한 뒤로는 로펌에 나가고는 있었지만, 송무에는 완전히 손을 떼었지요. 그러나 강의, 집필, 강연, 재야활동 등으로 분주하게 살았고, 몇 권의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에도 그동안 모아놓은 자료나 기록을 정리해서 신간을 준비하고 있어요.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장기 연재물 ‘내가 만난 잊을 수 없는 사람들’과 비슷하게 <그분을 생각한다>라고 책이름도 지어놓았지요.

변호사님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이신데, 그 길을 걸어오시면서 가장 보람찬 일로 기억되는 대표적인 사건이나 활동을 소개해 주신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라는 표현은 저한테는 과분하고, 또 자칫 ‘허위사실 유포’에 해당될 수도 있는 표현입니다. 그런 호칭에 대해서 저 나름의 거부감도 있고, 또 적절한 용어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시대 상황을 놓고 보면 왜 그런 용어가 생겼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는 있어요. 제가 검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 1965년인데, 그동안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그런 사건들을 제법 많이 변론한 셈이지요. 그중에 어떤 사건이 제일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을 더러 받는데, 모든 사건이 다 기억에 남고, 또 기억해야 할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1974년 4월의 소위 대통령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문제 삼은 민청학련 사건과 그 배후 조종의 누명을 쓰고 마침내 처형까지 당한 인혁당 사건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것은 사건의 규모로 보나 악질적인 날조, 그리고 대법원 선고 18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처형하여 국제적으로 사법살인의 오명을 뒤집어썼다는 의미에서 천인공노할 사법 범죄였습니다. 나중에 38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났다고 해도 죽은 목숨이 되살아오는 것은 아니기에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시국사건들을 변호하시면서 변호사 자격이 정지되는 등의 많은 어려움을 겪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제를 가장 힘들었던 시절로 기억하시는지요.
법적으로는 변호사가 유죄판결을 받고 확정되면 일정기간 자격이 상실됩니다. 제가 맡았던 시국사건의 변론과 관련해서 저 자신이 피고인이 되어 유죄가 확정되었어요. 현역 변호사로서 시국사건 변호를 담당할 때에는 그 변호 활동에 관련된 여러 가지 형태의 당국의 방해라든가, 또 저에 대한 감시, 봉쇄 등이 불편하고 고통스러웠지요. 당시는 정보기관에 끌려가서 여러 가지 물리적인 가혹한 행위를 당하는 일도 드문 일이 아니었어요, 그뿐 아니라 온전한 변호를 할 수 없도록 당국의 공작이 따르기도 했는데, 그에 대처하는 것 그 자체가 어려웠어요. 그리고 변호사 자격이 박탈된 뒤에는 그야말로 실업가가 아닌 실업자가 되었으니 생계에도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지요.

가족들이나 친척에 대한 탄압은 없었는지요.
최소한 가족은 감시의 대상이었고, 한때는 우리 집 앞에 있는 채전(菜田) 공터에 초소를 만들어 놓고 사복형사들이 근무를 하기도 했어요.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인권변호사라는 명칭에 대하여 적절치 않다고 하셨는데, 변호사법상 변호사의 사명이 기본적 인권 옹호에 있으므로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변호사의 사명으로서의 인권 옹호에 관하여 변호사님의 견해를 여쭙고 싶습니다.
변호사법 제1조에 인권 옹호와 사회정의 실현을 변호사의 사명으로 규정해 놓았으니까 변호사가 그런 사명수행에 충실한 것은 당연하지요. 그런데 인권변호사라고 하면 변호사라는 말속에 인권을 지킨다는 뜻이 담겨있는데, 공 잘 차는 축구선수, 헤엄 잘 치는 수영선수라는 말처럼 동어반복이 되어서 부자연스럽지요. 또 하나는 인권변호사라는 부류와 그러한 호칭이 붙지 않는 변호사 사이에 자칫하면 갈등이 생길 수도 있어요. 인권변호사를 강조하면 다른 부류의 변호사에 대한 차별, 이렇게 비칠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적절치 않다고 보지요. 또 다른 이유는 어떤 정치적인 사건에 변호인 선임계만 내놓고 법정에는 나온 적도 없던 사람이 나중에 그 사건을 변호했다고 자기를 내세우는, 다분히 정치적인 사람들 때문에 마땅치 않다고 보는 의견도 있지요. 다만 왜 인권변호사라는 호칭이 생겼는가 하는 점은 우리나라 특유의 억압적인 정치 상황에 연관된 용어이기에 이해는 할 수 있어요.

 오늘도 공 잘 차는 축구 선수 등과 같이 인터뷰 중에 쓰시는 표현에서 나타나듯 변호사님은 불의에 항거하며 올곧게 살아오시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은 대표적인 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처럼 고난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은 비결이나 철학은 어떠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적인 상황이라든가, 변호사 직무의 성격 자체가 너무 건조하고 정서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답답함에서 벗어나서 여유를 찾고, 또 나 자신의 의지를 지탱해가는 방법으로 해학 또는 유머가 참 좋다고 여겼어요. 그런 것이 없으면 숨 막히고, 더군다나 사법관계 문서에서 보듯이 삭막한 현실에 대응하다 보니까 그로부터 비켜서거나 탈출하는 데 유머라는 윤활유가 참 긴요했고, 그걸 통해서 각박할 때 숨고르기를 하고 살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금 전, 변호사 자격을 박탈 당하셨을 때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인권변호사로 살아오시면서 생계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으셨는지요.
사람은 생활이나 물질에서 일상적 빈곤까지 원하는 사례는 별로 없다고 보며, 특히 변호사 하면 연상되는 치부의 가능성에 대한 욕심도 나무랄 수만은 없겠지요. 어느 선배가 하시는 말씀이 변호사는 면기난부(免飢難富)다, 그러니까 굶어 죽을 염려는 없으나 그렇다고 부자 되기도어려운 것이다. 부자 될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인데, 이것이 경제적으로 생활이 어려울 때 저를 지탱해 준 잠언이기도 합니다.

지금 저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장소가 프레스센터인데, 변호사님이 그동안 걸어오신 길을 보면 신문, 방송, 문학 등 언론, 문화 분야에서 활동한 경력이 다수 보입니다. 이처럼 변호사 직역 외에 다른 분야에서 많은 활동을 한 계기나 동기가 있었는지요.
저는 대학시절에 언론인이 되는 것이 희망이었지만 그때 세상이 부패하고 혼란스러워 언론인은 자신이 없어 그만두었고 법조계로 나왔는데, 1965년에 변호사 개업을 하니까 바로 기자협회에서 고문변호사를 해달라고 했어요. 이 건물이 당시 기자협회가 있던 곳인데, 언론단체의 여망에 부응해서 약간의 봉사정신과 전문성을 발휘했던 것이지요. 또 하나는 70년대부터 해직기자들이 속출하여 개인적인 신상문제나 언론투쟁에서 겪는 여러 가지 피해, 그런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방어전을 펴다 보니까 언론 쪽과 촌수가 좀 가까워졌어요. 특히 한겨레신문 창간 전후에는 창간 위원장도 하고.

또 저는 본격적으로 문학을 한 사람은 아니지만, 문학을 하는 문인들은 많이 알고 지냈습니다. 문인들과 많이 어울리다 보니 저도 아류처럼 끼어 살기도 하고, 어쨌든 그 세계가 나름대로 제 생리하고 맞는 게 많이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문인들이 핍박받고 하면 제가 법정 변론도 맡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이지요.

언론에 보도된 바로는 변호사님이 최근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국가배상 청구를 하여 항소심 판결이 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관하여 소개해 주실 수 있는지요.
얼마 전에 재판이 다 끝났어요. <어떤 조사>라는 제 글이 반공법에 위반된다고 해서 대법원에서도 유죄가 확정되었는데, 그 글에서 제가 애도했다고 하는 김규남이라는 사형수가 비록 처형된 후이지만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기 때문에 저도 그렇다면 당연히 무죄가 되어야 한다고 해서 재심을 청구했던 것이지요. 물론 당연한 귀결이지만 무죄판결을 받았고, 그렇다 보니까 그 잘못된 판결 때문에 8년동안이나 변호사 활동을 못하고 살아온 데 대해서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배상 판결을 받은 것입니다.

변호사님이 유죄판결을 받은 사건이 필화사건으로 김규남 씨를 애도하는 글을 쓴 것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어느 매체에 쓴 글이었는가요.
동아일보사가 발행하는 《여성동아》라는 잡지에 수필체로 쓴 글인데, 사형제도를 비판하는 내용이었어요. 당시 저는 한국앰네스티의 임원으로 있으면서, 앰네스티가 지향하는 목표 중의 하나가 사형제도의 폐지이므로 제가 그 분야에 관심을 갖고, 계몽적인 글을 하나 써보았던 것인데, 당국은 저의 시국사건 변호를 막아보려고 저를 잡아가면서 표면상으로는 반공법 위반이라고 했어요. 1975년의 일인데, 박정희 씨가 그전에 구속했던 사람들을 그 해 2월에 대폭 석방을 했어요. 이때 풀려난 김지하 시인이 신문에 인혁당 관련 투고를 해서 잡혀 들어갔으므로 제가 검찰에 변호인 선임계를 냈더니, 중앙정보부에서 그 사건 변호를 하지 말라는 강력한 요구가 두 번 연달아 왔었지요. 그런데 두 번 다 거절을 했더니 바로 이 <어떤 조사>라 는 내 글을 문제 삼아 구속 기소를 한 것이지요.

최근 우리나라에서 법관에 대한 탄핵이 논의되고, 법관이 피의자가 된 이른바 사법농단 사태에 대하여 이것이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바로 서기 위한 불가피한 진통인지에 관하여 변호사님의 견해를 여쭙고 싶습니다.
이른바 사법농단의 내용은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져 있는데, 저는 많은 시국사건이나 양심수를 변호해 온 법조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러한 사법부의 내막에 대하여 일찍부터 비판과 경고를 많이 해 온 사람입니다. 사법권의 독립이라는 것이 외부로부터의 작용 못지않게 사법부의 내부적 요인으로 인한 ‘내풍이 더 문제’라는 글을 여러 번 써 왔습니다. 작금의 사법부의 증상을 보면 내부에서 빚어진 요인이 외부에서 작용하는 것보다 훨씬 나쁘고, 사법의 본질에 치명적인 자해행위인 점을 지적한 것이 그런대로 맞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한가지 말씀드리면, 우리 법원은 그동안 사법파동이라는 걸 서너 번 겪었는데 파동을 겪고나면 그 원인이 되었던 사법 부조리가 시정이 되어야 하는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다시 파동 전의 현상이 되풀이되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증거 없는 유죄판결이나, 법률해석을 잘못하여 오판을 한 것이라면, 그다음에는 그런 오판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옳은데, 똑같은 과오를 반복하곤 했거든요. 더구나 이번 사법농단은 내상(內傷) 즉 내부 요인에 의한 참사에 해당되고, 그 양상이나 규모가 전례 없이 심각한 만큼, 이 기회에 국가기관의 체면이 날아가더라도 본 때 있게 처리해서 다시는 그런 과오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법관들이 깊이 각성을 하고 국민들의 질책을 아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로스쿨을 통한 변호사의 대량 배출 등으로 법조가 급변하고 있고, 과거와는 달리 변호사 개업이 생계를 보장해 주는 시대도 지나간 것 같습니다. 후배 변호사들이 앞으로 어떤 직업관을 갖고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할 것인지에 관하여 변호사님의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로스쿨 문제를 포함해서 국민참여재판제도의 도입과 공판중심주의 강화 등이 제가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을 때 입법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로스쿨출신들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저도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는데, 입법 당시에도 로스쿨 입학 정원이나 로스쿨 인가 학교 수가 너무 많으면 법조인의 과잉 현상이 문제가 된다고 보아 여러모로 많은 논의가 있었지요. 작금의 현안문제에 대해서 당장 명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변호사가 수임 사건의 기록을 끼고 법정에 출입하는 것만을 직분으로 알고 거기에만 매달려서는 안되고, 변호사 스스로 직역을 확대하고, 새로운 텃밭을 개척해서 전문성도 살리고 소득 증대도 하면서, 사회에 더욱 기여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하시고 있는 운동이나 특별한 비결이 있는지요.
건강에 대해서 묻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주 이런 질문을 받다 보니까, 이젠 모범답안 비슷한 것이 하나 생겼습니다. 즉, 지금의 저는 환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건강한 사람도 아니고 애매하지요. 그래서 그런 물음에 대한 제모범 답안은 “나이만큼 건강합니다”입니다. 그렇게 답변하면 국회청문회에도 무난히 통과될 것입니다. 누구도 트집을 잡을 수가 없지요. 또 “요즘 무슨 운동을 하십니까” 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변호사니까 석방운동을 많이 하지요”라고 답하면서 서로 웃고 넘어갑니다.

가정생활이든 직업생활이든 통틀어서 언제가 재미있었던 시절이셨는지요?
언제라고 딱 생각이 나지는 않습니다. 다만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변호의 성과가 나타나면 기분이 좋고, 앰네스티라는 국제 민간기구의 이름을 내세우고 양심수의 석방 등 지원 활동을 할 때가 참 좋았어요. 그리고 제가 감옥살이를 하면서 일찍이 저작권법을 공부해서 학교나 문화계 등 여러 분야에서 저작권 계몽을 한 것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국내에서 저작권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희박했고, 미국이나 EU 등 선진국들이 외국인의 저작권을 존중하라고 압력을 가해 올 때 국내에서 거기에 대응하는 역할을 할 만한 전문가도 드물었지요. 그리고 정치적 사건의 자료나 문헌을 정리해서 책을 내다보니, 문고판을 포함해서 40여 권의 책을 낸 것도 제 나름의 성과라고 자임합니다. 불의한 시대의 재판, 의로운 사람들의 수난을 옆에서 직접 보고 겪은 제가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런저런 책을 냈어요. 누군가는 남겨야 할 기록을 소개하고 정리를 했다는 점에서, 내심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회의보다 뒤풀이가 좋고 대담보다 여담이 더 가슴에 와닿는 것은 만고의 진리인가 싶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진수는 인터뷰가 끝난 뒤 나온 느낌이다. 변호사님은 초지일관을 강조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처음 교사가 되고자 사범학교에 지원했으나 낙방했고, 두 번째 KBS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했으나 역시 고배를 마셨다고 한다. 그리고 기자가 될 생각도 있었으나 한국전쟁 직후의 혼탁한 언론풍토에서 올바른 언론인의 사명을 다할 자신이 없어서 아예 그쪽은 포기했다고 하신다.

결국 고시를 통해 법조인이 된 것은 네 번째 지망을 이루어 낸 터이고 보니, 제4지망을 소중히 받들어 일관된 삶을 걸어오신 셈이다.

인터뷰/정리 : 강병국 본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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