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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반딧불의 묘"
  바가지를 머리에 쓰고 경례하는 세츠코                            사진(출처_네이버영화)

영화 반딧불의 묘(火垂るの墓)를 처음 본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십수 년 전이다. 그 때 이 영
화를 보고 너무 슬퍼 나도 모르게 눈물을 한참 흘렸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초등학생이 된 딸애들과 두 번째로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인지 슬픔의 감흥을 잘 느끼지는 못하는 듯 하였으나 나는 또다시 하염없이 슬픔에 잠겨 눈물을 흘렸다. 가끔 이 영화 주제가가 생각나면 유튜브를 통해 듣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어린 여자 주인공 세츠코가 죽어가는 모습이 너무나 슬퍼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망울망울 맺히곤 하는 영화이다. 눈물을 흘리고 나면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정화(精華)되는 것을 느끼곤 하였다.

영화 반딧불의 묘는 일본의 유명한 문학상인 나오키[直樹]상을 수상한 노사카 아키유키[野坂照如]의 소설을 1988년 다카하타 이사오[高畑勳] 감독이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로 제작한 작품이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스튜디오 지브리의 세 번째 작품으로 음악은 지브리 영화의 단골 작곡가인 히사이시 조[久石讓]가 담당했다.

열차에 탄 사람들을 바라보는 세이타와 무릎을 베개 삼아 잠든 세츠코

 이 작품은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과거의 전쟁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오늘날 물질문명으로 소외되어 가는 현대인들의 삶의 문제까지 깊이 있게 접근하고 있는데 혹자는 이 영화에 대해 전쟁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서의 일본을 코스프레 한다며 가증스러운 영화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두 어린 남매 주인공들의 주관적인 상황을 객관적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여 일부 위정자들이 저지른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가에 대해 매우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지브리 스튜디오가 만든 애니메이션 특유의 사실적인 생활상의 묘사와 사진을 촬영한 듯한 주변 환경에 대한 치밀한 배경 묘사들은 그 자체로 전쟁의 참혹함과 그런 상황이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는 점을 섬세하게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화는 먼저, 주인공 세이타[淸太, 중학생 1학년 정도의 남자아이]가 기차역 대합실에서 파리의 공격을 받으며 서서히 죽어가지만 그 주위를 지나치는 비정한 어른들은 “쯧쯧”거리며 한숨만 내쉴 뿐 그 누구도 세이타에게 다가가 도움의 손길을 주는 이가 없는 비정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즉, 작품 시작 단계에서부터 감독은 고아가 된 세이타와 세츠코[節子] 남매가 국가나 주변 어른들의 보살핌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영양실조에 걸려 비참하게 죽어간 이유로써 기성세대와 어른들은 물론 그러한 죽음을 야기한 국가의 무책임함과 비정함을 강렬하게 꼬집고 있다.

‘소화(昭和) 1945년 9월 21일 밤, 나는 죽었다.’라는 주인공 세이타의 다소 충격적인 독백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기차역 한켠에서 영양실조에 걸려 서서히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맞은편에 서서 지켜보는 주인공 세이타의 영혼의 독백을 시작으로 세이타의 영혼은 먼저 죽은 여동생 세츠코의 영혼과 반딧불이 가득한 공간에서 서로 반갑게 만나고 곧장 부모님들의 영혼과도 상봉하며 과거 지극히 짧기만 하였던 행복한 시절을 회상한다.

곧이어 이야기는 세이타가 죽기 3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4세의 세이타는 고베[神戶]에 미군 폭격기 B29의 대공습이 있던 날, 네 살짜리 여동생 세츠코와 함께 밖으로 대피하지만 어머니는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고,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그 다음날 결국 숨을 거둔다. 부모를 잃은 남매는 먼 친척 아주머니의 집을 찾아가지만 점차 냉대를 받고, 결국에는 친척 집을 나와 마을에서 동떨어진 냇가에 마련된 어두운 방공호(인공 동굴)에서 살게 된다. 그들은 방공호 앞의 냇가에서 반딧불을 잡아서 방공호 안에 걸어둔 모기장 안에 풀어놓는다. 그러나 다음날 반딧불은 모두 죽는데 이는 그들에게 닥칠 죽음을 암시한다. 오빠 세이타는 어린 세츠코에게 먹일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공습 사이렌이 울리면 죽음을 무릅쓰고 빈집이나 밭에 들어가서 각종 먹을거리를 훔친다. 그러나 영양실조로 극도로 쇠약해진 세츠코는 각종 전염병에 노출된 야외 동굴생활의 질 나쁜 생활에서 오는 여러 질병에 시달리다 어느 날 흙으로 만든 구슬을 사탕이라고 생각하며 누워서 그 흙구슬을 힘겹게 빨고 있는 사태까지 이르게 된다. 이런 세츠코를 본 세이타는 근처 수박밭에서 수박을 훔쳐 세츠코의 입술에 가져다주기도 하는데 너무 쇠약해진 세츠코는 그마저 삼키지 못하고 결국 그날 밤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죽은 세츠코를 위해 세이타는 마지막으로 세츠코가 아끼던 인형과 사탕통 등을 넣어 개울가 언덕에서 시신을 화장하며 곧 다가올 자신의 죽음도 예견한다.

열차에서 세이타가 꺼낸 사탕을 쳐다보는 세츠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의 감흥은, “실제로 내가 세이타가 되고, 내 여동생이나 내 딸이 세츠코가 될 수도 있었단 생각에 눈물이 한가득 난 영화였다.”라는 느낌이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고아가 된 두 남매의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전쟁의 잔인함과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있다. 여기서 간과하기 쉬운 점은 이 영화가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혹자들이 말하는 전범국가의 일본인 남매가 아니라 그 전쟁을 통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고아 남매라는 것이다. 결국 감독이 그려내고자 한 것은 모국인 일본이 저지른 어리석은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어린 남매의 비극적인 짧은 삶이다. 이런 감독의 생각은 영화 곳곳에서 보인다. 그러한 측면은 주인공인 세이타와 주변인과의 갈등에서 나타난다. 먼저, 세이타와 세츠코가 할 수 없이 의지하게 된 친척 아주머니와 그 아들은 군국주의에 세뇌 당한 당시 일반 일본인들의 보편적인 사고를 가진 인간들로 나온다. 그 보편적인 사고란 것은 아주머니와 세이타의 대화에서 확실히 보인다. 흰쌀밥 대신 세이타, 세츠코 남매에게 묽은 죽을 주는 이유를 그녀는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과 빈둥거리며 노는 아이들과 어찌 똑같이 먹을수 있냐?”라는 논리로 설명하며 남매에게 핀잔과 학대를 가한다. 그와 같은 이야기를 그녀는 두 번이나 더 거듭해서 말하며 세이타가 전쟁을 위해 일하기를 독촉하지만 이 영화에서 감독의 분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세이타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 이 영화의 감독은 자국이 벌인 전쟁을 비판적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음을 명확히 드러낸다.

또한 이와 더불어 감독은 전쟁을 통한 자국민의 비인간화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적 시각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가진 소년과 나이 어린 소녀다. 그에 반해 주인공의 아버지는 일본 태평양 함대의 사령관이며,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의 중심에 서 있지만, 그 자신도 전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죽고, 어른들이 일으킨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전쟁 속에서 어린 남매도 비참하게 죽게 된다. 그런데 그 어린아이들조차 가끔은 군인 흉내를 내며 놀기도 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에게조차 주입된 군국주의와 패권주의 이데올로기의 허망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영화는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뭇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선량한 다수의 사람들은 전쟁의 격랑속에서 당장 하루하루 먹고사는 생계문제에 부딪히게 되면서, 결국 선량한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점은 시간이 갈수록 이기적으로 변해가며 어린 남매를 구박하는 친척 아주머니와 세이타가 영양실조에 걸린 어린 동생을 위해 수박을 훔치려다 밭주인에게 붙잡혀 반쯤 죽을 정도로 구타를 당하는 장면에서 여실히 보여준다.

열차에서 서로 마주본 채 웃음짓는 오누이

 전쟁은 인간 사회는 물론 자연과 동물 등 우리 모두가 공존하는 공간으로서의 지구 그 자체를 파괴하는 극악한 범죄행위에 해당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내에서도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가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면서도 미군에 의해 피해를 입은 일본을 부각시켰다고 보는 사람들도 다수 있는데 그러한 지적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보다는 철저하게 반전을 중심테마로 한 영화인 것이다. 사실, 영화에 등장하는 어린 남매는 물론 그들을 방치한 다수의 어른들 역시 지배계층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의 희생자들이다. 즉, ‘군국주의의 망령’이라는 시스템에 의해 이데올로기가 주입되고, 훈련되어서 이웃 나라인 우리나라와 중국, 동남아시아 국민들에게 짐승 같은 잔인한 만행들을 저질렀지만, 그들 역시 인간성을 말살당한 희생자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전쟁이란 피해국이나 전범국이나 할 것 없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최근 군국주의의 부활을 갈망하는 일본의 일부 정치인들에 대한 강렬한 비판적 메시지로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는 듯 느껴진다.

성중탁 교수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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