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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물

안산시 목내동에 있는 일진전기에 가면 바로 공장 울타리 안에 ‘관우물’이라는 표석(標石)이 있다. 바다를 떠돌던 관이 이곳에 도착하였고, 나중에 육지가 바다로 더 넓어지면서 이곳에는 우물이 생겼다. 그리하여 관이 닿았던 곳의 우물이라고 하여 관우물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바다를 떠돌던 관이 닿은 곳의 우물이라...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을 듯하다. 지금부터 관우물 속으로 들어가 보자.

관우물 표석이 있는 일진 공장 뒤편은 얕은 구릉이 이어지고 있다. 바로 그 구릉 어느 터엔가에 단종을 낳은 현덕왕후의 무덤 소릉이 있었다. 현덕왕후는 세자빈 때 단종을 낳고 며칠 안 되어 죽었기에, 이곳의 무덤은 처음부터 왕릉으로 조성된 것은 아니고 문종이 왕위에 등극하자 소릉으로 격상되어 다시 꾸며진 것이다. 능이 있었다고 하여 그 밑의 마을도 능안마을이라고 불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단종은 야심만만한 삼촌 수양대군에 의해 폐위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는다(또는 사약을 받기 전에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고도 한다). 단종의 뒤를 이어 수양대군이 세조로 등극하는데, 사서에 보면 세조는 피부병으로 고생을 많이 하였다. 충북 보은의 정2품 소나무도 세조가 피부병 치료차 속리산 법주사를 찾으면서 만난 소나무에 정2품을 하사했다는 것 아닌가? 야사에는 세조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자신의 아들을 죽인(또는 죽이려고 하는) 세조를 저주하면서 세조의 얼굴에 침을 뱉었고, 이 때문에 세조가 피부병을 앓기 시작했다고 한다. 세조가 명분 없이 친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세조가 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하여도 현덕왕후에 시달리는 꿈을 꿈직도 하다. 게다가 자신의 아들인 의경세자가 20살에 병으로 죽으니 현덕왕후의 저주가 아들에게까지 미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야사는 이런 점에 착안하여 세조가 이에 보복한다고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바다에 던져 버렸다는 것이다. 야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더 나아간다. “바다를 떠돌던 현덕왕후의 관은 바다를 돌다가 관우물 표석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사람들은 현덕왕후의 관이 다시 돌아왔음을 짐작하였으나, 세조의 후환이 두려워서인지 아무도 관을 수습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느 농부가 용기를 내어 몰래 관을 건져내어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후에 관이 도착한 곳에 우물이 생겼는데, 그때부터 사람들이 이를 관우물이라고 부른다.” 전에 이런 관우물의 이야기를 우연히 알고는 안산지원 재판에 갔다가 틈을 내어 관우물을 찾았었다. 그리고 관우물 표석을 다 읽은 후 사진기를 꺼내어 표석과 그 뒤의 소릉이 있었음직한 구릉을 사진에 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일진전기 공장을 사진에 담는 것으로 오해한 공장 경비원으로부터 ‘웬 수상한 놈이냐?’는 의혹의 눈초리를 받기도 하고...^^

그런데 세조가 아무리 속 좁은 왕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악몽을 꾸었다고 하여 자기 형수인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바다에 버리라고 하였을까? 세조가 불법적으로 왕위를 찬탈한 것이니 단종 복위운동도 여기저기서 일어났었다. 현덕왕후의 어머니 아지(阿只)와 동생 권자신(權自愼)도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였다는 이유로 사형당하였다. 그러자 현덕왕후의 무덤도 왕릉의 예로 모셔져서는 안 된다고 하여, 현덕왕후를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고 소릉을 개장하여 서인의 무덤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소릉을 파헤친 것은 사실로 보이나, 세조가 관까지 바다에 던져버리라고 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 이렇게 현덕왕후의 무덤이 수난을 겪게 되니까, 세조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가 확산 전파되면서 관우물의 야사가 생기게 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사약을 먹고 죽은 단종은 그 후 중종 때 복위되었다. 당연히 평민의 무덤으로 개장되었던 현덕왕후의 무덤 소릉도 다시 왕릉으로 격상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종은 동구릉에 현릉으로 모셔져 있지 않은가? 더구나 문종은 현덕왕후가 죽고 난 후 새로 왕비를 받아들이지도 않아 홀로 외롭게 묻혀 있었다. 그리하여 복위된 현덕왕후를 소릉에 그대로 모시지 않고, 문종의 무덤 현릉 옆에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모셔 지금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야사에 의하면 명령을 받은 관리가 관을 찾느라고 끙끙대자,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관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고 한다(또는 관을 묻었던 농부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걱정 말고 관가에 알리라고 했단다). 그런데 이번에 글을 쓰면서 인터넷 자료를 찾다 보니 단종이 즉위하면서 어머니 현덕왕후를 아버지 문종의 현릉 옆으로 모셨다는 얘기도 나온다. 그렇다면 세조가 파헤친 것은 구리 동구릉에 있는 현덕왕후의 무덤이었다는 것이 되는데, 이곳은 관우물이 있는 안산 바닷가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아무리 야사라고 하지만 구리에서 버려진 관이 안산의 바닷가까지 왔다고 하기에는 비약이 지나친 것이다. 그리고 단종 1년(1453)에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면서 왕이 되기 전에도 실질적으로 왕의 권력을 휘둘렀기에, 단종이 왕위에 있으면서 현덕왕후를 문종 옆에 모시기에도 시간상으로 충분치가 않다. 그러므로 아무래도 세조가 파헤친 무덤은 안산의 소릉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관우물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만한 이야기다. 안산시로서는 관우물을 소릉과 연결시켜 스토리텔링을 그럴듯하게 꾸미면 관광객들을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일진전기 마당 내에 달랑 표석 하나만 있을 뿐이고, 현릉으로 옮겨가기 전의 소릉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표시도 잘 되어 있지 않다. 또한 소릉 터에서 발굴된 석물(石物)들의 일부는 이대박물관, 안산시 향토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나머지는 사람들의 손을 타고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표석 앞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지만, 관우물 표석이 울타리 너머 일진전기 마당에 위치하고 있어 지나는 사람들 중 이에 관심을 가지고 쳐다보는 사람도 별로 없다. 관우물에 흥미를 갖고 찾아갔던 나에게는 아쉬운 일이었다. 다음에 다시 관우물을 찾는다면 그럴듯하게 스토리텔링이 된 관우물을 만나고 싶다.

양승국 변호사
● 법무법인(유) 로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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