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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제목부터 도발적인 이 책은 선조 8년(1575) 동서분당(東西分黨)부터 선조 22년(1589) 기축옥사(己丑獄事) 후 동인이 몰락하는 시대(1590)까지 약 15년 간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조선시대 사화와 당쟁은 역사극에서 많이 다뤄지는데, 한국 정치와 관련하여서는 현실의 문제이기도 하다. 저자 이정철 박사는 이 책으로 올해 제19회 지훈국학상을 수상했다.

사서삼경 중 <대학>에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가 나온다. 조선시대 학자이자 언론인, 나아가 현실 정치까지 떠맡았던 지식인들에게 유교적 이상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왕조 500년을 거치면서 형성된 이러한 문화와 의식은 오늘날에도 뿌리깊게 남아있다. 이는 오늘날의 한국은행권에서 여전히 조선시대 인물들이 주인공인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대한민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기회가 부여된다고 한다. 공직으로 진출하는 선거 때마다 좋은 사람을 뽑고자 하고 그렇게 뽑힌 사람이 좋은 정치를 하리라는 기대와 신뢰가 있다. 그러나 현실 정치는 권력 획득을 목표로 행해지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어떤 시대에서든지 정치행위는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다. 정치행위에서 갈등은 필연적이고 당쟁은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정치현상이다. 그럼에도 한국적 현실에서 당쟁의 특수성을 이해하기 위해 당쟁이 가장 격렬했던 시대의 그 발생 원인, 전개 양상, 결과 등을 점검하는 것은 의미가 크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의 선조(宣祖) 시대의 이황, 이이, 기대승, 이산해, 성혼, 이원익, 노수신, 심의겸, 김효원, 정철, 유성룡, 이덕형 등 조선왕조에서 그 시대만큼 쟁쟁한 인물들이 함께 활동한 적은 없었다. 이들이 추구했던 정치적 이상은 드높았다. 성리학 이론과 도덕심으로 무장한 지식인들은 정치를 주도했다.

선조 8년(1575), 김효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인과 심의겸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으로 나뉜 ‘동서분당(東西分黨)’이 발생한다. ‘사림(士林)’이라고 부르는 젊은 지식인들이 정치 무대에 등장하면서 관직 인사권을 가지고 있던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동서분당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급기야 동인은 과거 사림과는 예각을 세웠던 구신(舊臣)과도 힘을 합쳤다. 이들은 권력욕, 사익 추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훈척 시대의 부도덕함을 비난하고 명분을 내세우면서 대거 조정에 등장한 이른바 ‘삼사(三司)’, 즉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언관(言官)들이 대신(大臣)들을 압도하였다. 언관은 대신보다 직급이 낮지만, 임금과 직접 소통하고 여론을 주도할 수 있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의사결정 방식은 전원합의에 따르고, 합치가 되면 처치(處置)를 한다. 합치가 안 되면 피혐(避嫌)하여, 사헌부에서 사간원으로, 사간원에서 홍문관으로 넘겼다.
언관들은 사림 내에 당파를 형성하여 반대 당파의 탄핵을 주도하고 의도대로 되지 않으면 임금에게 자주 사직을 요청하였다.
이들은 자기 당파는 ‘군자(君子)’, 반대 당파는 ‘소인(小人)’이라고 규정하였으며, 서로 공론을 내세우고 상대를 몰아붙였다. 사림을 통합하여 국정개혁을 시도했던 이이는 동인과 서인 모두의 미움을 샀고 정계 은퇴 시 ‘소인’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조선 건국 이래 최초의 군(君) 출신 왕인 하성군(河城君),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수렴청정을 받았고 왕으로서의 정통성이 취약하였던 선조는 당파의 갈등과 세력균형을 절묘하게 이용하여 개혁과는 거리가 먼 권력 강화를 달성했다.

파국은 선조 22년(1589) 정여립을 비롯한 동인들이 모반 혐의로 박해를 받은 기축옥사를 겪으면서 1,000여 명의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건이다. 후에 유성룡은 임진왜란을 회고하면서 저술한 <징비록>에서 왜구를 막아낼 한줌의 인재도 없다고 한탄하였다. 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된 당쟁과 사화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1590년 일본의 정세를 탐지하려고 파견된 통신사행의  정사 황윤길(서인)이 왜군의 침입을 경고한 반면에, 부사 김성일(동인)은 반대 의견을 낸 것은 서인과 동인의 치열했던 정치싸움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정치적 수세에 몰려있던 서인들이 전쟁의 위험성을 과장하여 동인들의 공격을 막아내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동인들은 받아들였다.

유성룡조차 이이의 국정개혁을 거부했던 사례에서 그 문제의 심각성이 확인된다. 이이는 선조 13년 조정에 복귀하면서 분열된 사림을 통합하여 그 단합된 힘으로 선조에게 개혁을 요청하고자 하였다. 개혁의 골자는 공안(貢案, 공물 수취를 위한 정부문서)을 개정하고 전국 고을의 수령을 줄이며 각 도의 감사를 오래 근무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이의 개혁 요청이 거듭되자 선조는 다른 신하들에게 그 개혁 사항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사헌부 장령 홍가신은 이이의 주장에 적극 찬성했다. 그러나 유성룡은 이이의 논의가 시의에 맞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유성룡은 “개혁하는 것은 진실로 옳다. 하지만 이이의 재주로 그 일을 해내지 못할까 염려될 뿐이다.”라고 말했다. 유성룡과 친밀한 홍가신의 표현을 보면, 더욱 노골적이다. “개혁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이 일을 이이와 함께 할 수는 없다.”

성승환 변호사
●법무법인 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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