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츤데레 판사님의 영장 기각

내가 배당받은 사건은 그야말로 범죄 종합 세트였다. 이미 경찰이 의뢰인을 체포하고 곧이어 구속 영장을 신청하였지만 운이 좋게 구속되지 않았고, 실형을 면하는 것을 목표로 선임된 사건이었다.

의뢰인은 1999년생으로 어떻게 보면 매우 어린 나이였다. 사건을 파악하기 위하여 그를 사무실로 불러서 미팅을 하였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왜소한 체격에 앳된 얼굴을 한 그 사람이, 이런 범죄를 저질렀다니 믿을 수 없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연민을 느꼈다.

그의 범죄사실은 3회에 걸친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카메라등이용촬영), 8회에 걸친 강제추행, 4회에 걸친 강요 및 유사강간, 2회에 걸친 상해, 강제추행미수였다. 사귀던 여자친구인 피해자가 다른 남성과 연락을 했다는 이유로 저지른 범죄치고는, 너무나도 잔인하고 극악무도했다.

양형자료를 준비해야 하는데, 다른 의뢰인만큼 잘 준비해오지 않았다. 연락도 잘 닿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 연락이 닿으면 꼭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밤을 꼬박 새워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그의 목소리에서 절박함과 처절함이 느껴졌다.

사건이 검찰에 있었고, 경찰에서 일부 혐의를 다퉜던 만큼 분명히 의뢰인에게 연락이 갈 사안이었다. 그가 전화를 잘 받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이 됐는데, 역시 검찰에서 전화가 왔다. 우여곡절 끝에 의뢰인과 연락이 닿아 검찰 조사를 받았고, 전부 번의하여 자백했다. 평소 의뢰인이 검찰의 전화를 잘 받지 못해 인상은 좋지 않았겠지만, 영장의 재청구 없이 검찰의 기소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달 정도가 지나서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검찰의 청구서 내용은 형사소송법에 기재된 기본적인 내용에 더하여 피해자와의 합의를 위하여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고, 피의자가 반성하고 있는지 의문이며, 같은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2차 피해가 우려된다는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영장청구서는 의뢰인을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으로 묘사하는 재주가 있다. 의뢰인은 나와 피해자 측 국선변호인을 통해서 합의를 진행하고 있었고, 자신이 다니던 학교마저도 자퇴한 상황이었다.
변호인 의견서를 준비하고, 법정 앞에서 의뢰인을 만났다. “최선을 다하겠지만,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낙심하지 말자. 어차피 이 사건 무조건 합의해야 하는데, 구속되면 피해자 감정이 누그러지면서 합의가 더 잘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먼저 들어가는 편이 나을 수 있다.”라며 의뢰인을 위로했다.

의뢰인에 대한 구속영장실질심사가 시작됐고, 나의 의견 개진 차례가 되어 의견서를 제출하고, 진술했다.

“ 먼저 구체적인 의견을 밝히기 전에, 이 사건 피의자는 전부 번의하여 자백하고 있고, 검찰의 수사를 성실하게 받았으며, 수사도 거의 다 된 상황으로, 검사가 기소만 하면 되는데 영장을 재청구한 것에 대하여 강한 유감을 표합니다.”
“ 유감이라니요, 범죄 사실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변호인으로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어서 검찰의 영장청구서 내용과는 달리, 의뢰인은 나와 피해자 국선변호인을 통하여 합의를 진행하여 온 점, 피해자와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였고 피해자에게 연락하여 제2차 피해를 유발할 경우 의뢰인이 감당해야 하는 불이익을 충분히 알고 있는 점 등을 피력했다. 그리고,

“ 검찰이 시민위원회를 거쳐서 영장을 재청구한 것 역시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검찰은 이미 조사를 거의 다 끝냈고, 피의자를 구속하고자 한다면 그냥 영장청구하면 됩니다. 왜 굳이 시민위원회를 거쳐서 영장을 청구한 것인지 시민위원회의 결정은 존중하나 서류만 보고 판단한 것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 그런 건 말하지 마시고, 구속 사유에 대해서만 말씀하세요.”

“ 변호인으로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서류가 아니라 사람을 봐주셨으면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의뢰인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는데 꽤 인상적이었다. 자기변명만 늘어놓는 무책임한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는 확실히 자기 책임을 논했다.

“ (전략) ……. 제가 얼마나 중범죄를 저질렀는지 알고 있습니다. 합의가 되지 않으면 제가 받아들여야 할 결과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을 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남은 시간 동안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부족할지라도 최선의 배상을 하여 드리고 싶습니다. 또 부모님께 빚도 갚아야 합니다. 저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수갑이 다시 채워지는 의뢰인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나오는데 몹시도 불쾌했다. 의뢰인이 매우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고, 피해자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주었으며,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에 공감한다. 그러나 의뢰인에게는 내가 아니면 그의 편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

재판장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변호인의 변론 중에 끼어드는 것은, 판사 대 변호인의 관계를 떠나 기본적으로 굉장히 무례한 처사였다. 변호인의 변호권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기본권인데, 나의 변호권이 침해됐다는 생각에 분하기까지 했다. 변호인이라면 응당 그와 같이 변론했어야 했다. 법에 어긋나는 변론이 아니었다. 당장에 법관 평가를 검색하기도 했다.
분을 삭이기도 전에 정신없이 다른 사건의 수사에 참여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장이 기각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에게 소식을 알려 준 직원도 기적과 같은 일이라며 놀라기도, 축하해 주기도 했다.

‘츤데레 판사님이신가?’
순간 나의 불쾌하고 분했던 그 마음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서류가 아닌 사람을 봐달라는 나의 진심과, 피해자와 합의가 되지 않아 들어갈 땐 들어가더라도 정리할 시간을 달라는 의뢰인의 진심 어린 말이 담당 판사의 마음을 흔들었던 것 같다.

안갑철 변호사
●법무법인 한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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