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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각색과 법률적 판단

어렸을 때 친한 친구, 백수 삼촌 등 누군가가 아이스크림을 한 입 달라고 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필자의 경우 필자보다 열 살이나 많은 친형이 베어 문 한 입은 도저히 한 입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의 절반이 순식간에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형의 ‘한 입’은 ‘두 입’을 가장한 한 입이었다고 생각했다. 형이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횟수나 모습은 ‘한 입’이었을 것이어서 ‘두 입’이라는 나의 판단은 주관적인 것이다.

필자가 속한 법무법인 팀에서는 영화와 관련된 법률자문과 소송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중 최근 항소심에서 판결 선고가 난 사건 하나가 유독 마음에 남아 본 기고의 계기가 되었는데, 이 사건의 쟁점이었던 ‘감독의 시나리오 각색 의무’가 필자의 어렸을 적 ‘한 입’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이 사건의 쟁점은, 영화 연출을 맡은 감독이 영화 촬영 전(前) 단계에서 시나리오 각색 의무 등 한국 영화계에서 감독이 관례적으로 제공하는 모든 용역을 다하였는지 여부에 있었다. 영화 시나리오는 영화 촬영의 밑거름이 되는 동시에 주연 배우 캐스팅을 비롯한 메인투자 유치에도 지대한 영향을 줄 만큼 영화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타짜 : 원 아이드 잭’이나 ‘양자물리학’ 등의 영화가 번뜩이는 영감으로 완성된 시나리오 초고에만 밑바탕을 두고 촬영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시나리오는 대개 초고, 2고, 3고, … 최종고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각색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되며, 이 과정에서 영화제작사와 시나리오 작가 또는 감독(시나리오 각본 또는 각색을 맡은 경우) 사이에 수없이 많은 논의와 협의의 과정이 수반된다.

필자가 맡은 사건은 위와 같은 과정에서 영화제작사와 감독 간에 시나리오 각색 방향에 관한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고 감독의 마지막 각색고를 받아본 후 영화제작사는 감독계약을 해제하였다. 이에 영화감독은 감독계약유효확인의 소를 제기하였다가 소송 도중 영화 촬영이 끝나 극장 개봉까지 완료되자 청구를 손해배상청구로 변경하였다. 1심에서 영화제작사를 대리한 우리(필자가 속한 법무법인 팀)는 영화감독이 마지막으로 전달한 시나리오 각색고에서도 남자 주인공의 연령1)만 수정하는 등 한국 영화계에서 감독이 관례적으로 제공하여야 하는 용역을 완전하게 이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아쉽게도 1심 법원은 우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자 주인공의 연령만 수정한 시나리오 각색이더라도 이는 영화감독이 각색 의무를 이행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1심 법원은 영화제작사의 감독계약 해제는 위법하다고 보아 영화감독인 원고의 손해배상청구를 일부 인용하였다. 이어진 항소심 사건에서도 법원은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 시나리오의 각색 여부에 대하여 법적인 판단을 하는 것은 예술적 판단을 해 달라는 것이라면서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영화제작사를 대리한 우리가 보았을 때 분명히 영화감독이 마지막으로 전달한 시나리오 각색고는 도저히 영화제작사의 기획의도를 반영한 감독의 각색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각색고는 실제 개봉된 영화의 장면들과도 달랐다.

남자 주인공의 연령만 바꾼 시나리오라도 무언가 바뀌었다는 점에서 보면 각색을 한 것이니 시나리오 각색 의무를 다하였다고 볼 수 있고, 형식적으로 바꾸기만 한 것은 영화제작사의 기획의도를 고려한 각색일 수 없으니 시나리오 각색 의무를 다하였다고 볼 수 없다는 두 가지 판단이 존재한다. 아이스크림 한 입도 한 번의 횟수로 아이스크림을 베어 문 것이면 한 입이라고 볼 수 있고, 설령 그렇더라도 도저히 한 입의 양으로 볼 수 없는 한 입이라면 한 입으로 볼 수 없다는 두 가지 판단이 존재한다.

항소심에서 우리는 영화감독이 마지막으로 전달한 시나리오 각색고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사정, 즉 감독계약 기간 중 영화감독이 영화제작사 모르게 다른 일을 활발하게 영위하고 있었던 사실을 과세정보제출명령 신청을 통해 밝혀냈고, 이는 항소심 법원의 판단에도 영향을 주었다. 다른 일에 매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나리오 각색에 전념할 수 없었다는 것이 우리 주장의 요지였다. 생각해 보면, 친형이 베어 물었던 필자의 아이스크림 한 입이 억울했던 것은 형이 입을 쫙 벌리고 두 입의 양을 먹을 기세로 한 입을 베어 문 행동이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형의 ‘한 입’이 ‘두 입’이라는 필자의 주관적 판단의 배경에는 형의 위와 같은 행동이 있었고, 이는 한편으로 객관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항소심 법원이 예술적 내지 주관적 판단이라면서 난색을 표했던 순간 영화감독이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무는 과정에서 어떤 행동을 하였는지를 밝혀낸 우리의 판단은 적중하였다.

항소심 법원은 감독계약에서 영화감독의 ‘전념 의무’라는 개념을 도출하여 영화감독인 원고가 위 의무는 물론 겸직금지 의무를 명백하게 위반하였다고 판단하였고 1심 판결을 뒤집고 원고 패소 판결을 선고하였다. 항소심 법원은 전념 의무 위반 여부의 판단 근거로써 영화감독이 남자 주인공의 연령만 수정한 시나리오를 제공하였다는 점도 지적하였으므로, 결국에 영화감독인 원고가 시나리오 각색 의무도 위반하였다는 취지로 판시한 것으로 보인다.

항소심 법원은 판결문에서 ‘영화감독의 의무가 완전하게 이루어졌는지 여부에 관하여 단순히 결과물의 예술적인 완성도 측면에서 판단하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영역에 속하여 용이하지 않지만’이라고 밝히긴 하였으나, 뒤이어 ‘반면 제작사의 입장에서는 감독의 의무이행 과정에 요구되는 성실성이나 전념 의무를 담보할 필요성도 있다고 보이므로’라고 거듭 밝힘으로써 시나리오 각색에 대한 법률적 판단에 대한 부담과 과감한 결단의 배경을 설명하였다.
현재 영화감독인 원고가 상고를 한 상황이라, 향후 상고심에서 어떠한 판결이 선고될지 알 수 없다. 다만, 향후 이 사건의 결과가 영화감독과 영화제작사 간의 계약과 한국 영화계 관행에 미칠 영향은(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건의 영화는 상당한 흥행을 기록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분쟁이 계속 중이라는 사실, 영화업계에 실제의 사실과 다른 소문이 퍼진 것 등으로 인해 영화제작사 측은 오랜 기간 동안 상당한 심적인 고통을 받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또한 시나리오 각색 의무와 관련해서는 예술적, 주관적 판단의 영역이라 항소심 법원도 주저하거나 난색을 표하는 부분이 심리과정에서 느껴졌기 때문에 항소심 판결을 예측하기도 어려웠다. 다행히 2016년경에 시작된 이 사건 소송은 항소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이 사건은 신생제작사의 첫 작품과 관련한 소송에서 승소한 영화제작사 측의 앞날을 응원하는 메시지도 있어 개인적으로 보람을 느낀 사건이었다. 이 사건과 같은 유형의 소송을 많이 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법원이 예술적, 주관적 영역에 속하여 용이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사안에서도 법률적 판단으로 과감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면밀한 주장·입증의 필요성을 실감하기도 하였다.

필자는 형이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문 게 비록 크게 느껴졌어도 형에게 아이스크림을 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만일 얕은꾀를 썼다면 한 입 단위로만 베어 물 수 있는 아이스크림을 사거나 두 개로 쪼갤 수 있는 아이스크림을 샀을 것인데, 굳이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형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그나마 주관적 판단이 허용될 수 있는 관계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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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나리오에 기재된 남자 주인공의 나이를 의미한다.

곽호성 변호사
●법무법인(유) 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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