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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증권 시대의 개막

들어가며
우리는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 이미 접한 사람을 직접 보았을 때 “실물이 훨씬 나으시네요”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그것은 그 사람과 직접 대면하게 되어 예의상 그러할 수도 있지만 매체가 전달하지 못 하는 실물만이 가지는 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9월부터 최소한 증권의 영역에 있어서만큼은 실물보다 더 큰 힘을 가지는 새로운 매체에게 그 자리를 내어 주게 되었다. 증권이 나타내고 있는 권리를 종이(실물)가 아닌 전자적 데이터에 기반하여 발행하고 유통하는 전자증권제도가 9월 16일(월)에 전면적으로 시행됐기 때문이다.

실물 vs 디지털 코드
우리가 통상 사용하는 유가증권 또는 증권이라는 용어는 눈에 보이는 실물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즉 증권(證券)이라는 용어에 종이 권(券)자가 들어 있는 바와 같이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종이라는 유체물에 제반 권리 내용을 기재한 것이라는 의미가 단어에 이미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종이라는 실물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증권의 실물을 본 사람을 주변에 찾아보면 그리 많지 않다. 증권 관련 업무가 일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필자도 증권박물관에 방문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증권 실물을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져본 일이 거의 없다. 그것은 대량의 증권을 발행하고 유통하여야 하는 현대 사회에서 그 발행·유통되는 수량만큼의 실물 증권을 실제로 발행하기도 어렵고, 이미 발행된 증권이 있다고 하더라도 매매 등의 사유로 타인에게 이전해야 하는 일이 발생한 경우 그 이전을 하는 일 역시 상당히 쉽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한 개인의 사회생활은 물론이고 국가 경제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화폐라는 존재에도 이미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사피엔스』에서 세계 전체의 화폐 총량은 약 60조 달러이지만, 눈에 보이는 실물 화폐는 그 10%인 6조 달러도 되지 아니하고 나머지 90%이상의 액수는 컴퓨터 서버에만 존재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나아가 대부분의 상거래는 하나의 컴퓨터 파일에 들어 있는 전자 데이터를 다른 파일로 옮기는 방식으로 이뤄지며 실제로 실물을 주고받지도 않는다고 덧붙였다.

결국 경제사가 시작하는 초기에는 종이라는 수단을 매개로 하여 화폐 또는 증권을 발행하고 유통시켰지만, 경제와 자본시장이 급격히 성장하고 이에 필요한 화폐와 증권의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실제로 실물을 발행·유통하기란 어렵게 된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증권 발행·유통제도의 종착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경제주체들은 증권 실물을 발행하거나 유통하는 것이 점차 어려워짐에 따라 이에 대한 해결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첫걸음이 증권의 부동화(immobilization)를 기반으로 한 증권예탁제도였고, 그다음이 증권의 무권화(dematerialization)였으며, 그다음이 바로 증권의 전자화(digitalization)였다. 즉 부동화를 통하여 이미 발행된 실물의 이동을 최소화하였고, 무권화를 통하여 실제 발행하지 않더라도 발행한 것으로 간주하여 사무처리를 하는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전자화에 의하여 아예 증권을 전자적 데이터의 형태로 존재하게 한 것이다.

물론 전자증권제도의 본격 시행 이전에도 사실상 증권 실물의 발행 없이 제반 업무 처리가 이루어진 점은 있으나, 실물 발행을 전제로 하는 법제에 따른 제반 업무 절차와 관련규제 등으로 인한 비효율, 비용 또는 손실이 꾸준히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증권의 전자화가 갖는 함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화폐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이러한 증권의 전자화 또는 전자증권이 가능하게 된 것은 IT기술 발전의 덕택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 실물의 형태가 아닌 디지털 코드(digital code)의 형태로 권리를 표창하고 이를 DB에 저장하며 나아가 시스템과 네트워크를 통하여 그 권리를 타인에게 이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결국 발달된 IT기술로 인하여 가능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작; Begin Again
지난 오랜 시간 경제와 자본시장의 발전과 함께 했던 유가증권이니만큼 기존의 법제 역시 이 유가증권을 기준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일견 당연한 일일 것이다. 따라서 전자증권제도를 도입하고자 했던 나라들이 수행한 일은 전자증권과 관련한 법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화폐금융법(1981)을 제정하여 이미 오래전 전면적인 전자증권제도를 도입했던 프랑스, 사채·주식 등의 대체에 관한 법률(2004)을 제정하여 2009년에 전자증권제도를 도입한 일본 등이 그러한 대표
적인 예이다.

우리나라 역시 이러한 나라들의 사례를 종합 검토하여 지난 2016년「주식·사채 등의 전자등록에 관한 법률」(이하 ‘전자증권법’)을 제정하였고, 이후 3년여의 준비 작업을 거쳐 2019년에 전자증권법 시행령 및 관련 하위법규의 제정을 통하여 전자증권제도 시행을 위한 법제를 완비한 바 있다.

그런데 이렇게 전자증권법제의 마련 및 이에 따른 전자증권제도의 시행이 이루어졌지만, 이는 어찌 보면 증권제도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실물이 아닌 디지털 코드의 형태로 존재하는 전자증권의 법적 성격은 무엇이며 그리고 이에 따른 취급은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민법, 상법, 민사집행법, 자본시장법 등 기존의 법체계와는 어떠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해서 보다 정교하게 정돈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마무리하며
지난 3년여간 전자증권법령 입법 작업에 참여하면서 느낀 점은 전자증권제도는 어찌 보면 우리나라 금융제도의 튼튼한 기초 체력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명시적으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정교하고 탄탄하게 구성된 전자증권제도라는 인프라를 바탕으로 우리나라가 지향하는 금융선진국의 미래가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비록 순서는 OECD 36개국 중 34번째이지만, 그 완성도와 성숙도는 타 국가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는 날이 곧 오기를 희망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최지웅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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