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나라, 진보 살아남기

2008년, 대규모 촛불집회가 연일 국민들의 이목을 사로잡던 즈음이었다. 종로3가 지하철역에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상징하는듯한 풍경을 목격했다.

지하철 계단 앞에서 스무 살 남짓한 두 여성이 전단지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한 번 읽어 보셔요. 고맙습니다.” 그들은 전단지를 받아 드는 행인들을 향해 공손하게 절을 하며 환하게 웃었다. 나도 전단을 받으며 가까이서 둘을 자세히 보았다. 얼굴에 털이 보송송한 게 잘해야 새내기를 막 벗어난 대학교 일이 학년쯤으로 보였다. 이명박 정부의 반민주성을 비판한 그 유인물에 대해 행인들의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의를 보이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대여섯의 노인들이 나타나서는 이런저런 항의나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두 여성의 머리채를 휘어잡는 게 아닌가. 갑자기 들이닥친 봉변에 놀란 두 사람은 이렇다 할 항변도 하지 못한 채로 두어 걸음 끌려갔다. 놀라운 것은 그 광경을 보고도 노인들을 말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나는 뒤돌아 서서 그들에게 급히 다가갔다. “어르신들, 왜 이러십니까? 이 학생들이 무엇을 잘못했나요? 행인들의 길을 막은 것도 아니고 큰 소리를 낸 것도 아니고 대체 손녀 같은 아이들에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러자 어르신들은 잡았던 머리채를 마지못해 봐 준다는 태도로 놓았다. 그러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벌써부터 빨갱이 놀음을 해? 늬들이 전쟁을 알아? 공산당을 알아?” 그들의 걸음은 비척거리는 노인이었지만 목청만은 청년처럼 드높았다. 나는 이 풍경을 오래 잊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완고한 보수의 나라이다. 『역사의 연구』로 저명한 토인비는 일찍이 이런 한국인의 본성을 잘 꿰뚫었다. 그가 보기에 한국은 보기 드문 보수적 민족이었다. 동서고금에 한 왕조가 오백 년 이상 지속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서양은 물론 중국도 이삼백 년을 넘는 왕조는 드물다. 그런데 우리는 신라 천 년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리고 고려와 조선이 각각 오백 년을 지속했다.

우리 국민은 대체로 썩은 문짝처럼 주저앉은 고려를 지키고자 했던 정몽주의 단심을 이방원의 개국의 기개보다 더 어여삐 여긴다. 가까이로 근현대사를 거칠게 일별해 봐도 그렇다. 반외세 민족자주를 외치고 ‘사람이 하늘‘이라며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의 존엄과 평등을 외친 동학혁명은 외세를 등에 업은 왕조에 의해 처참한 비극으로 끝맺었다. 해방 후는 어떤가? 진보의 싹은 송두리째 잘려 버렸다. 민족일보 사건, 조봉암 진보당수, 70년대의 인혁당 등등. 오늘날의 관점에서 살피자면 굳이 그들을 ‘진보’라고 부르기에도 망설여질 만큼 ‘상식’과 ‘민족애’에 기초한 것이었지만. 사오십 년 지난 다음에서야 가까스로 이들에게 무죄가 선고된 현실이 너무나 뼈아프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당대의 권력이 그토록 미워해서 무고한 이들의 목숨을 앗아버리는 ‘사법살인’이 횡행하는 이 보수의 나라에서 왜 ‘진보’는 절멸하지 않고 생명을 이어가는 것일까? 노인들에게 머리채를 휘어 잡힌 두 여학생은 정말 진보일까? 그들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헌법으로 보장하고, 유엔이 권장하는 ‘시민적 정치적 권리’인 자유권을 수줍게 행사했을 뿐이다. ‘진보’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다. ‘체제론적’, ‘철학적’, ‘생물학적’ 여러 접근법이 있겠으나 대체로 ‘불합리한 제도와 물질의 결핍, 낡은 사고방식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존재로서 행복을 추구하게 하는 것’ 정도가 국민이 수용하는 수준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반상과 남녀의 구별 없이 모든 인간이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동학의 자각은 참으로 위대한 진보사상이 틀림없다. 이로부터 우리의 근대는 시작된 것이다.

‘유신헌법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는 것’조차 감옥행이었던 유신체제에 반대한 운동, 80년대의 민주화운동, 학생들에게 차별 없이 국가가 좋은 밥을 제공하자는 무상급식, 같은 일을 하면서도 절반급여를 받아야 하는 비정규직 철폐운동, 페미니즘, 생태주의 환경운동 등은 진보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렇게 마땅하고 올바른 방향과 이를 이루기 위해 풍찬노숙에 온갖 시련과 희생을 감내하는 진보운동을 왜 권력자는 그토록 미워하고, 국민들은 왜 또한 신뢰하지 않는 것일까?

어떤 이는 언론환경의 ‘기울어진 운동장’론으로 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해석한다. 일리 있는 진단이다. 세계 어느 문명국에 한국 같은 ‘기울어진 운동장’이 있을지. 수백만 부를 넘는 우리의 주류신문과 종편까지 합세한 보수적 방송환경을 고려하면 2030세대에 위력적이라서 보수정부가 위험시하고 있는 최근의 몇몇 팟캐스트나 SNS의 힘은 그야말로 ‘태산명동서일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도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10년이 존재했다. 혹자는 이를 두고 ‘하느님이 개입한 부정선거’라고도 하고 어쩌다 일어난 대형사고로 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전히 한국에서 진보적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살아가기가 참으로 힘들다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나는 ‘기울어진 운동장’ 탓으로만 돌리고 싶지는 않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사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진보운동 내부의 일각에 ‘발달장애’적 고루한 현실인식이 존재하고, 이를 침소봉대하여 진보진영 전체를 국민과 괴리시키는 공안세력이 엄존하기 때문이다. 이 공안세력들은 필자같이 대한민국 헌법이 지향하는 이념과 가치를 최고의 규범으로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자조차 앞서의 노인들처럼 서슴없이 ‘종북좌파’로 규정한다.

왕조부터 민주공화국 반세기에 이르기까지 굳건한 보수의 나라인 대한민국. 여기서는 종로3가 무료급식소에서 줄을 서서 밥을 기다리는 어르신들이 ‘종부세’를 세금폭탄이라며 비난하면서 항상 보수당을 선택하는 ‘계급배반’투표를 감행한다.

유신을 반대했고, 복지사회를 꿈꾸고, 80년대 한때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나는 분명히 ‘진보’일 것이다. ‘발전국가’, ‘민주국가’를 거쳐 이제는 세계사의 보편적 흐름에 맞추어 ‘복지국가’로 내 조국이 ‘진보‘하기를 소망하는 나는 스스로 ‘애국자’라고 믿는다. 그리고 불합리한 제도와 하늘이 준 인간의 존엄을 모독하는 가난과 불평등이 존재하는 한, 지구 어느 곳에든 ‘진보’는 살아있을 수밖에 없다. 이번 6.4 지방선거에서 진보교육감이 석권한 것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도 이길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새는 두 개의 날개로 멀리 날아간다”
 

바라건대, 오른쪽 날개만 너무 비대한 대한민국이 균형 잡힌 왼쪽 날개를 가졌으면!

전 국가인권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