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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업(開業)과 일상(日常)

개업을 했다. 생각보다 많은 화환을 받으며 너무 감사하지만 속뜻이 격려인지, 동정인지, 위로인지 하는 생각이 든다. 한 손으로 익숙하게 컴퓨터를 켜다가 창가에서 노래진 잎이 나를 재촉함을 느낀다. 코로나19의 한가운데 비수기라는 8월에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를 수도 없이 고민하고 선택했지만 아직도 영 석연치 않다. 하지만 조금 안도가 되는 것은, 많은 계획과 이벤트들이 날짜를 분명 무수히 갈라놓고 있음에도 내 일상이 전과 별로 다르지 않은 점이다.

월급을 받을 때도 나름의 고충은 있었다. 아침밥을 먹기 전에 아메리카노와 박카스로 오후까지 급한 잠을 깨우고 매일같이 야근을 해야만 하니, 밤에는 또 신기하리만치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까지 설치는 밤들 이후 급기야 해가 뜨고 잠이 들기를 몇 달, 출근 시간과 취침 시간이 같아질 무렵이 되자 우선 아무 문제 없던 정든 직장에 퇴직을 말했다. 앞에는 아무것도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

눈앞에 아무것도 예정되어 있지 않은 날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별에 유난히도 아파했던 젊은 날에도 공부 한자 못하고 시험장에 갔지만, 떨어져도, 이별해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정든 사법시험과 이별하고 입대하던 서른 살에도 오늘 같은 까마득한 미지의 세계였지만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50원짜리 자판기 커피 하나 뽑으려고 기숙사 방을 다 뒤지다가 잠들어도 무심히 해가 떴고 룸메이트가 나를 깨웠다. 로스쿨에서의 일상도 특별히 다를 바 없었다. 일어나서 잠을 깨우고 법서를 보고 정리하고. 그리도 다시는 보기 싫던 법서들을 다시 꺼내 들었을 때, 부인하고 싶지만 재미가 있는 것도 전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변호사가 되고, 그리던 금융 일을 해 보아도, 정치가와 권력자와 전문가의 곁에서 일을 배워 보아도, 하고 싶지 않던 형사사건 처리에 익숙해져도, 또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졌어도 나의 일상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단지 한두 달 앞의 일정만 조금 예정되어 있을 뿐, 미래는 아직도 미궁이다.

물론 나 스스로는 내가 과거에 해 왔던 것들을 부인하고 새로 시작하고 싶다. 남들처럼 몇 년은 무엇을 하고, 몇 년은 무엇을 하고, 몇 년에 결혼한다고 계획하고, 이루고, 소소하더라도 무언가에 휩쓸려 버리지 않고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삶을 써 나가고 싶다. 만약 과거에 제1안으로만 살아왔다면, 미래를 좀 더 분명히 바라보며 계획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여전히 드는 생각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모든 약속과 계획은 스케치일 뿐, 현재라는 진한 펜으로는 결국 무엇을 그리게 되는지, 전체 그림에서 그 부분이 무엇을 의미하게 될지 나는 여전히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사건 역시 그러하다.

사건도 삶도, 오히려 경험이 쌓여 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그런 생각은 더 진해져만 간다. 그 와중에 단 하나 위안이 되는 것은, 알 수 없기 때문에 남들이 안 된다 하는, 내 스스로 안 된다는 확신이 드는 희망도 품고 살아가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희망이 있는 삶이란 그 자체로 즐겁기 마련 아닌가. 결과는 계획과 선택에 있지 않고, 일상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내가 잘못 그었다고 생각했던 선들과 연주해버린 불협화음들의 의미와 멋은, 전체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나 다음 마디가 끝날 때쯤 알게 될 것이다. 오늘의 의미를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일상은 어쩌면, 꿈을 꿀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알 수 없는 미래를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가진 인간들이 애써 안심하고 하루를 보내기 위해 만든 개념이지 않을까. 일상은 어쩌면 희망의 또 다른 시점에서의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업했는데 야근도 주말 출근도 달라지지 않은 오늘은 또 하나의 광복절이다. ‘대통령께서 일본에 먼저 손을 내밀었다’는 기사를 본다. 화환을 물에 넣으며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 달라졌다면 달라진 일상이다. 9시 뉴스를 보는 삶을 꿈꾸던 22살 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는 오늘도 일상이다. 익숙하게 컴퓨터를 켜고 키보드에 손을 올린다.

이용수 변호사
● 법무법인 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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