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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묘역길의 왕실식구들

 

연산군 묘역 Ⓒ연합뉴스


북한산둘레길 20구간을 걷다 보면 연산군 묘역을 지나게 된다. 

20구간은 도봉구 방학동의 정의공주 묘역에서 출발하여 고개를 넘어 우이-신설 경전철의 우이동역까지 약 1.6km를 걷는 짧은 코스이다. 짧은 코스에 세종대왕의 딸인 정의공주 부부 묘역과 연산군 묘역이 있어 특히 20구간을 왕실묘역길이라고 부른다. 연산군 묘역은 북한산 둘레길이 이 앞으로 지나면서부터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연산군이 처음부터 여기에 묻혔던 것은 아니다. 연산군은 왕에서 쫓겨나 강화 교동도에 유배된 지 몇 달 만인 1506년 11월 8일에 죽어 처음엔 그대로 교동도에 묻혔었다. 그러다가 1512년 아내인 거창군부인 신씨의 탄원으로 이곳으로 이장된 것이다. 원래 이 일대는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땅이었다. 그런데 신씨가 임영대군의 외손녀이었기에 연산군을 이리로 옮겨 달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본인도 1537년 사망하여 이곳 남편 옆에 묻혔다.

연산군 부부의 무덤 아래로는 딸 휘순공주와 사위인 구문경의 묘도 있다. 휘순공주는 한때 시아버지 구수영에 의해 이혼당하였다. 구수영은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재빨리 반정 측에 가담하였는데, 폐위된 연산군의 딸을 그대로 며느리로 두었다가는 자기에게 화가 미칠 거라는 이기적인 생각에 중종에게 허락을 받고 아들 부부를 이혼시킨 것이다. 그러나 구수영의 기회주의적인 태도는 사람들에게 비판받았고, 2년 후인 1508년 대사헌 정광필의 주장으로 중종은 이들 부부를 다시 합치도록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양반 부부가 이혼했다가 다시 합친 경우는 매우 드물 텐데, 휘순공주도 아버지 연산군 때문에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구나 싶다.

그런데 묘역 위쪽의 연산군 부부 묘와 아래쪽 딸 부부무덤 중간에는 태종의 후궁이었던 의정궁주의 묘가 있다. 어떻게 연산군 가족묘에 태종 후궁의 묘가 끼어 있는 것일까? 언뜻 생각하면 연산군 가족묘에 의정궁주가 끼어든 것처럼 생각되지만, 의정궁주가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의 후궁이었으니, 의정궁주는 10대 임금이었던 연산군보다 당연히 먼저 죽었다. 그렇다고 다른 곳에 있던 의정궁주의 무덤을 이리로 이장해 온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의정궁주가 먼저 이곳에 터를 잡고 있었는데, 나중에 연산군 가족이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그럼 어떻게 의정궁주가 연산군 가족과 사후에 동거하게 되었을까?

의정궁주가 1454년 세상을 떴을 때에 의정궁주에게는 자신의 제사를 맡아 줄 아무런 후손이 없었다. 하여 임영대군이 의정궁주의 제사를 떠맡기로 하여, 의정궁주를 자신의 땅인 이곳에 모신 것이다. 의정궁주에게 후손이 없다고 하였는데, 처녀로 죽었기에 당연히 후손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좀 이상하지 않은가? 태종의 후궁이라고 하였는데, 그럼 태종이 의정궁주를 그냥 처녀로 두었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태종은 의정궁주와 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아예 없다. 사연인즉, 이렇다. 의정궁주는 태종이 56세로 승하하는 1422년에 후궁으로 간택되었다. 그런데 의정궁주가 미처 궁에 들어가기도 전에 태종이 승하하는 바람에 첫날밤도 치르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원래 후궁이라면 빈이 되어야 할 것인데, 궁에 들어가기도 전에 태종이 승하하는 바람에 빈이 되지 못하고 궁주가 된 것이다.

그나저나 의정궁주는 첫날밤도 치르지 못하고 그냥 숫처녀로 남아있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리 왕의 여인이 되었지만 재가하게 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어찌 되었든 왕의 여인이 되었으니 의정궁주는 재혼을 하지 못한다. 법도가 이러니저러니 하지만 숫처녀를 이렇게 묶어 두어야 하다니,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하여 이를 보다 못한 유생 곽장이 세종 6년에 의정궁주를 재가시켜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를 꺼냈으나, 왕조국가에서 곽장의 얘기는 씨도 먹히지 않는다. 오히려 곽장은 불경한 발언을 하였다고 의금부에 체포되어 국문을 받는다. 단순한 취조가 아니라 심한 고문이 따른다. 결국 곽장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해 버린다. 허~ 참~ 곽장의 발언이 그렇게 고문을 할 정도로 불경한 발언인가?

결국 의정궁주는 그 후 32년을 허울만 좋은 왕의 여자로 독수공방을 하다가 죽어 여기에 묻힌 것이다. 아무리 궁주로 대접을 받으면 뭐 하나? 억울하게 수절해야 했던 의정궁주가 불쌍하기만 하다. 의정궁주만 불쌍한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 궁녀들은 한 번 궁녀가 되면 평생 결혼을 하지 못하지 않는가? 개중에는 무수리 때 숙종의 승은을 입은 숙빈 최씨(영조의 어머니) 같은 궁녀도 있었지만,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이다. 그러니 조선은 그 수많은 궁녀들을 평생 처녀로 늙어 죽게 한 것이다.

왕실묘역길에는 정의공주 묘역도 있는데 연산군 묘역 이야기만 하고 끝내면 정의공주가 섭섭해하겠다.

정의공주는 세종대왕의 둘째 딸로 1462년(세조 8) 남편 안맹담이 먼저 죽어 여기에 묻혔고, 1477년(성종 8) 15년간의 독수공방을 마치고 뒤따라 이곳에 나란히 묻혔다. 이들 부부의 쌍분(雙墳) 앞에도 무덤이 하나 있다. 안맹담의 후손인 안종해(1681 ~ 1745)와 그의 부인 파평 윤씨의 합장묘(單墳)다. 죽산 안 씨 묘들은 근처 다른 곳에 있는데, 안종해는 왜 안맹담 부부 묘 바로 밑에 있을까? 안종해의 자녀가 선조 안맹담의 기를 받기 위해 안종해 부부의 묘를 안맹담 부부 묘 바로 앞에 모신 것일까? 정의공주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 때 대왕을 도왔다고 한다. 당시 세종대왕은 사대주의에 물든 신하들이 반대할까 봐 한글 창제를 비밀 프로젝트로 진행하였다고 하니, 아들, 딸들의 도움을 받았을 거다. 하여 도봉구에서는 해마다 ‘정의공주와 함께 하는 도봉한글잔치’를 개최하고 있고, 방학천 산책길에 세종대왕이 정의공주와 한글 창제에 대해 상의하는 장면을 모자이크 벽화로 장식하는 등 정의공주를 부각시키고 있다.
 

Ⓒ연합뉴스


정의공주는 언니 정소공주가 13살에 천연두로 죽는 바람에 더욱 세종대왕의 사랑을 받았다. 하여 세종대왕은 정의공주 부부에게 저자도를 하사하기까지 하였다. 저자도는 삼성동 앞을 흐르는 한강에 있던 섬이다. 그런데 뚝섬 제방을 쌓는 데, 또 경원선 철로 제방을 쌓는 데 이 섬의 흙을 퍼다 나르더니, 1970년대에는 압구정동 일대에 고층 아파트를 지으면서 섬의 흙을 전부 퍼가는 바람에 지금은 사라진 섬이다. 섬에 닥나무가 많아서 저자도(楮子島)라고 했고, 또 섬에 있던 바위 모습이 아이가 춤추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하여 무동도(舞童島)라고도 하였다. 저자도 앞에 이 섬의 닥나무로 한지를 만들던 닥점마을이 있었고, 또 근처에는 봉은사 밑의 사하촌(寺下村)이 있었다. 강남의 중심지 삼성동은 무동도마을과 닥점마을, 봉은사 사하촌을 합쳐 하나의 동으로 하면서, 세 개의 마을이 하나가 되었다고 삼성동(三成洞)이라고 하는 것이다. 정의공주 묘역 이야기를 하면서 강남의 삼성동까지 얘기가 이어졌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한번 왕실묘역길을 걸으면서 아버지를 도와 한글을 만들던 정의공주 그리고 연산군 부부와 의정궁주의 비극적인 삶을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양승국 변호사
● 법무법인(유) 로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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