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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대왕세종을 보고 사정전의 훈의 작업을 생각하다


OTT 서비스를 신청하니 텔레비전 드라마를 뒤늦게 챙겨 보는 일이 생긴다. 얼마 전에는 <대왕세종>(KBS, 2008년)이라는 86부작 드라마를 찬찬히 보았다. 등장인물을 과감히 재해석하고 현대어를 사용하는 등 ‘정통 사극’과는 결이 달라서 보는 사람마다 호오(好惡)가 갈리겠지만, 극 자체의 완성도가 높아서 좋았다. 주요 사건과 등장인물은 실제 역사에서 가져왔지만, 사서(史書)에 기록된 것과는 다른 전개가 눈에 띄어, 간간이 조선왕조실록을 뒤적여야 하는 수고가 필요했다.

수고를 감내하면서도 보게 되는 것은, 역시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세종 시대에 대한 흔한 선입견은, 세종이 태평성대를 구가한 ‘성공한’ 왕이었지만, 이는 아버지 태종이 단행한 피의 숙청 덕분이기도 하다는 것, 즉 아버지가 악역을 맡아 주었기에 공신이나 외척 등 대내적인 위협 요소가 사라진 가운데 한결 쉽게 능력을 펼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대왕세종>은 이에 대해 유력한 반론을 제기한다. 세종 특유의 화합을 중시한 치세는 그 자신의 정치철학에 따른 것으로, 그 철학을 관철하기 위해 때로는 적극적으로 아버지와 대립했을 것이며, 태종이 남겨 둔 쟁쟁한 신하들, 유정현(柳廷顯, 1355~1426), 박은(朴訔, 1370~1422), 하륜(河崙, 1347~1416), 허조(許稠, 1369~1439) 등과도 신념의 차이를 두고 치열하게 투쟁했으리라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갈등과 극적인 요소가 도출되고 악역들도 입체적으로 조명된다. 태종의 사람으로 세종대에도 판서를 두루 역임했으나, 부패사건에 연루되어 정승에 오르지 못했다는 정도로 기억되는 조말생(趙末生, 1370~1447)은 최고의 능력을 지녔으면서 세종과 가장 격렬하게 대립하는, 그러나 조선을(세종이 꿈꾸는 모습과는 다르나) 자신의 나라로 여기고 아끼는 독특한 인물로 거듭난다. 무려 집현전 부제학까지 올랐고 후일 왕(문종)이 되는 세자의 스승이기도 했으나, 훈민정음 반포에 대한 격렬한 반대를 제외하고는 실록에서 그에 대한 기록을 찾기 어려운 최만리(崔萬理, ?~1445)도, 실력으로는 오히려 정인지(鄭麟趾, 1396~1478)를 압도하고 성품이 소신 있고 완고하며, 그 성격 때문에 세종과 대립하는 길을 걷게 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여러 캐릭터가 매력적이지만, 특히 ‘윤회(尹淮, 1380~1436)’가 인상적이다. <대왕세종>에서는 윤회를 충녕대군과 어린 시절부터 인연이 있다가 멘토를 거쳐 오른팔로 거듭나는 인사로 그리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이 드라마에서 그리는 충녕대군 시절 일화는 대부분 픽션이다). 다만 그의 출중한 학식은 대제학이라는 벼슬이 말해 주듯 의문의 여지가 없고, 유별난 애주벽(愛酒癖)과 그로 인한 실수담은 태종실록이나 세종실록 곳곳에 나오므로 전혀 근거 없다고 보기 어렵다. 공조참판 신장(申檣, 1382~1433)의 아들 숙주(申叔舟, 1417~1475)를 손녀사위 삼은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윤회는 대제학을 역임하던 중 세종 18년(1436년)에 죽었는데, 사실 그의 큰 공은 따로 있다. 윤회가 죽고 얼마 뒤 세종이 제사를 내리며(賜祭) 보낸 제문을 보면, “내가 통감(通鑑)을 보니 …… 경에게 말하여 정밀하게 수집하게 하였더니, 책이 다 되기 전에 갑자기 부음을 들었도다. 의지하고 맡김이 한창 중인데,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빨리 앗아가는가”라고 아쉬워하고 있다[세종실록 72권, 세종 18년 4월 25일, 번역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운영하는 조선왕조실록 인터넷 홈페이지(sillok.history.go.kr)에 따름]. 세종이 윤회에게 정리하라고 명하였다는, 죽은 뒤에까지 따로 언급할 만큼 신경을 쓴 ‘통감’은 무엇인가.

조선은 성리학(性理學)의 나라이다. 성리학에서는 이론(體)을 열심히 공부하고 그 이론을 역사적 사례에 어떻게 적용하여 볼 수 있는지(用) 탐구하는 공부법을 강조하였고, 구체적 방법으로는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두루 읽게 했다. 세종 역시 신하들에게 이를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세종 7년 12월 8일, 세종 20년 12월 15일 등). 조선에서 국왕과 신하는 모두 성리학자여야 했고, 경연(經筵)이라는 세미나 자리에서 경(經)과 사(史)를 두루 강독하고 의견을 나누었다. 조선의 경연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그러니까 통치이념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대학연의(大學衍義)」와 「자치통감(資治通鑑)」, 그리고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이었다. 주자(朱熹, 1130~1200)가 「예기(禮記)」에서 일부를 뽑아 자신의 시각으로 정리한 책이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그리고 주희의 제자의 제자쯤 되는 진덕수(陳德秀, 1178~1235)가 「대학」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실제 역사에서 사례를 찾아 배열한 책이 「대학연의」이다. 「자치통감」은 [왕안석(王安石, 1021~1086)과의 신법 논쟁으로도 유명한] 북송시대 학자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주나라 시대인 기원전 403년부터 후주 시대인 기원후 959년까지의 역사를 망라하여 집필한 역사서이다.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후대에 특히 군주에게 교훈을 주고자 왕조의 흥망과 사건을 편집하고 그 자신 유학자인 사마광의 논평을 붙인 책으로, 당대에도,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천 년 간 애독되었다. 문제는 엄청난 양이다. 현재 국내에 출간된 번역서를 기준으로 비교해 본다면 「대학연의」가 두 권(이한우 옮김) 또는 세 권(김병섭 등 옮김)인 반면, 「자치통감」은 무려 32권에 달한다(권중달 옮김). 「자치통감」의 양은 당시 중국에서도 엄청나다고 받아들여졌던지, 「통감절요(通鑑節要)」 등 요약본이 다수 나왔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자는, 역사를 ‘범례 – 강 – 목 - 사론’으로 정리하는 독자적인 사관(綱目體)을 고안하여, 이에 따라 자치통감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이 프로젝트는 그의 제자인 조사연(趙師淵, 1150~1210)에 의해 완성되어,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자치통감」보다 오히려 더 큰 권위를 얻게 된다. 「자치통감강목」이 「자치통감」을 ‘요약’한 것처럼 보이나 그 양도 만만치 않아서, 아래에서 볼 「사정전훈의자치통감강목(思政殿訓義資治通鑑綱目)」을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번역 중인데, 절반 정도 진행된 2021년 2월 현재 19권까지 출간되었다. 고려 말 성리학에 대한 관심이 불붙으면서 「자치통감」이니 「자치통감강목」이니 하는 책들의 존재는 우리에게도 알려졌으나, 그 분량 때문에라도 실물이 널리 퍼졌던 것 같지는 않고, 조선 건국 후 명나라에 다녀온 사신들이 한 번씩 받아 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구하고 싶던 책을 어렵사리 몇 권 구해 왔다. 신하들에게 읽혀 경연에도 참석하게 해야 하고, 지방에도 보내어 새 나라의 이데올로기를 가르쳐야 한다. 저작권 문제도 없으니 기술만 있다면 무한복제가 가능하다. 그런데 수십 권에 달하는, 내용 또한 수준 높은 책을 어떻게 복사할 것인가. 목판은 인쇄 상태가 깨끗하지만, 한 글자를 잘못 새기면 판 전체를 버려야 했다. 이미 고려시대 발명된 금속활자는 틀린 글자만 바꾸어 끼우면 되었기에 낯설고 다양한 책을 교정하면서 복제하는 데 유리했지만 인쇄가 깨끗하지 못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천(李蕆, 1376~1451) 등의 활약으로 인쇄 상태가 개선된 금속활자가 개발된다. 태종 3년 주자소가 설치되어 계미자를 개발, 책을 복사하기 시작했고, 세종 때에는 기술적으로 진보한 경자자와 갑인자가 개발되었다. 주자소에서 책을 찍어 내면 집현전에서 검토해서 잘못된 글자를 집어 내고, 글자를 바꾸어 끼우고 다시 인쇄한다. 교정이 끝나면 맹렬히 인쇄하여 보급한다. 이런 식으로 세종 초에 이미 「자치통감」과 「자치통감강목」의 인쇄 · 보급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복사본을 받아 보면, 자연히 욕심이 생긴다. 텍스트에 대한 그간의 연구성과와 참고자료가 눈에 밟힌다. ‘단권화’의 유혹! 세종은 급기야 송(宋)-원(元)을 거치면서 200년간 축적된 「자치통감」, 「자치통감강목」에 대한 연구서를 수집하여, 이를 주석으로 보태는 작업(訓義)을 시작한다. 먼저 「자치통감」의 훈의본을, 곧 이어 「자치통감강목」의 훈의본을 내었다. 실무를 맡은 것이 집현전이고, 그 책임자였던 대제학 윤회는 「자치통감」 훈의본이 완성되고 「자치통감강목」 훈의본 작업이 한창이던 때 사망한다. 따라서 위에서 제기한 문제, 세종이 윤회가 다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고 아쉬워하고, 그의 업적으로 특별히 언급한 ‘통감’은, 「자치통감」 훈의본과 「자치통감강목」 훈의본을 가리키는 것이다(오항녕 교수는 이 대목을 들어 세종이 「자치통감」 훈의를 마치고 보니 「자치통감강목」 훈의를 하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치통감」과 「자치통감강목」을 모두 훈의할 계획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한편 집현전이 얼마나 두 책의 훈의 작업에 몰두했던지, 집현전은 원래 10명으로 시작하였는데, 「자치통감」 훈의 완성을 전후하여 32명에 달하여, 그 수가 너무 많으니 20명으로 줄이자는 건의가 있을 정도였다(세종실록 세종 18년 윤 6월 11일). 마지막으로 이 작업에 대한 세종 자신의 애정을 엿볼 수 있는 기사가 있어 옮겨 본다(세종실록 세종 16년 12월 11일, 번역은 위에서 언급한 조선왕조실록 인터넷 홈페이지를 다소 수정) : “대제학 윤회 등이 자치통감훈의를 펴내어 매일 저녁 궐내에 들이니, 임금이 친히 잘못된 것을 교정하고, 때로는 한밤중까지 하였다. 임금이 윤회 등에게 ‘요새 이 글을 읽으니 독서가 좋은 것을 알겠어요. 날로 총명해지고 잠은 줄었습니다.’라고 말하자, 윤회 등이 ‘밤에 작은 글씨(細書)를 보셔서 눈병이 나실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세종이 진두지휘하여 집현전의 인력을 쥐어짜고 자신의 눈을 버리며 윤회가 목숨을 바쳐 만들어 낸 책에는, 각각 「사정전훈의자치통감(思政殿訓義資治通鑑)」, 「사정전훈의자치통감강목(思政殿訓義資治通鑑綱目)」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사정전은 경복궁 내 세종이 사용했던 집무실 이름이다). 「사정전훈의자치통감강목」이 완성된 세종 20년(1438년)은 새 나라가 세워진 지 50년이 채 되지 않은 때였고, 그로부터 5년 뒤 훈민정음이 창제되었으며(외국어로 된 자료를 복사하며 외국어로 된 참고자료를 읽고 외국어로 된 주석을 달면서 세종은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서로 사맛디 아니”함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을까) 이후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470여 년을 이어 갔다.

■ 본 문에 열거되지 않은 참고자료는 다음과 같다.
魯耀翰, “朝鮮前期 通鑑學의 硏鑽에 대하여”, 語文硏究 제44권 제4호(2016년 겨울)
吳恒寧, “朝鮮 世宗代 《資治通鑑思政殿訓義》와 《資治通鑑綱目思政殿訓義》의 編纂”, 泰東古典硏究 第15輯(1998.12)
吳恒寧, “조선초기 경연의 『資治通鑑綱目』 강의”, 韓國思想史學 第9輯(1997)
이재명, “『資治通鑑』 硏究”, 全南史學 第12輯(1998.12.)
정재훈, “『대학연의(大學衍義)』와 조선의 정치사상”, 韓國思想史學 第64輯(2020.4.)

 

윤기열 변호사
● 보험개발원 개인정보보호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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