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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In necessaris unitas),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In unnecessaris libertas), 그리고 모든 것에는 사랑을(In omnes charitas)”

17세기 신학자 루퍼투스 멜데니우스는 매우 의미심장한 글을 남겼다.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한 번쯤 가슴에 새겨둘 만한 명구다.

뭣이 중한디?

‘뭣이 중한디?’라는 영화대사도 있고, 노래도 있다. 우리 삶에서 과연 무엇이 가장 본질적인 것일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추상적으로 정의해 보면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서 그 무엇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핵심적 가치가 아닐까 한다. 예컨대 이순신, 안중근에게는 조국사랑이 바로 본질적인 것이었겠고, 히틀러나 무솔리니에게는 세계정복의 욕심이 그런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평균적 다수가 수긍할 수 있는 본질적인 것은 이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려는 선한 의지 같은 것이 아닐까. 만약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적인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면 훗날 견디기 어려운 허무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일본 전토를 통일한 후 온갖 영화를 누리고도 모자라 침략전쟁을 일으켜 우리나라를 짓밟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죽기 직전에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니,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라는 시를 지어 탄식했다. 권력과 재물 등 아까운 것들을 남기고 속절없이 세상을 뜨려니 지난 모든 영광이 마치 꿈속에서 또다시 꿈을 꾼 것처럼 부질없고 허
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간 히데요시와 비교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의로운 투쟁을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로 걸어 들어간 독일인 디트리히 본회퍼다. 그는 미국에서 목사로서의 안락한 삶을 살던 중 1939년 친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광기의 불길이 휩쓰는 히틀러 치하의 독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치전복 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는 교수대로 떠나기 전에 동료 죄수들에게 “이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도 합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본질적인 가치에 충실하라는 명제는 소소한 우리 삶의 여러 국면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다. 우정과 의리와 사랑인가 아니면 돈과 명예와 쾌락인가 하는 종류의 기로에 섰다면 너무 길게 망설이지 말 일이다. 훗날 쓰라린 허무를 피하고 싶다면.

비본질적인 것에서 피어나는 똘레랑스

요즘의 미국에서 횡행하는 아시아인, 흑인들에 대한 증오범죄를 보면서 딱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사실 미국만큼 위험한 나라도 없을 것이다. 대도시에 해가 기울면 한가로이 공원이나 골목길을 산책할 수 없는 나라. 누가 총을 휘두르며 난동을 부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나라. 그런데도 모두들 가고 싶어 하는 기묘한 나라가 미국이다. 더구나 인종갈등과 백인우월주의가 팽배해서 황인종이나 히스패닉, 흑인들을 깔보고 사회의 주류에 편입시키지 않으려 하니 과연 선진국이라면서 이래도 되나 싶다.

인종이나 피부색이나 문화 등에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코 목숨 걸고 싸울 일이 아니다. 비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비본질적인 것에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곧 분열과 투쟁의 씨앗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온 외국인근로자들을 하대하는 정서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나 미국의 국민 대다수는 선량하고 도덕적인데, 왜 못사는 나라의 이민자나 취업자들을 깔보고 억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일까. 기독교 윤리학자인 라인홀드 니이버는 “인간은 개인적으로는 도덕적 존재가 될 수 있으나, 일단 집단 속으로 들어가면 그 집단은 비도덕적 경향으로 쏠리게 되고, 집단과 집단의 관계는 윤리적 기준이 아닌 힘의 균형에 의해 유지된다”고 설명했다. 2차대전 당시 일본이나 독일 지식인들이 전체주의 속에서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했는지를 회고해 보면 니이버의 말이 실감이 난다.

이런 문제의 해결책은 없는 것인가? 넬슨 만델라가 떠오른다. 27년간의 긴 투옥생활을 이겨내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대통령이 되었던 인물. 현대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자 평화의 화신으로 추앙받는 그는 과거의 참혹한 인권침해범죄의 진실을 낱낱이 밝혔지만, 자신과 흑인들을 박해한 단 한 명의 백인도 과거사로 처벌하는 복수를 하지 않았고, 흑백이 함께 나라의 위기를 해결할 것을 역설하고 실천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용서와 화해, 관용의 정신 곧, 참된 똘레랑스다.

결국은 사랑

릴케는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라는 시에서 “행복이 반짝거리며 하늘에서 내려와 날개를 접고 꽃피는 나의 가슴에 크게 걸려왔다”고 읊었다. 가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할 때 빌려오기 좋은 시구다. 단테의 신곡에 보면 지옥문 입구 간판에는 “여기에 들어오는 자들이여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는 살벌한 문구가 쓰여 있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악담이 또 있을까. 하지만 천국은 어떤가. 레테의 강에서 죄의 기억을 씻어내고 지혜의 강물을 마셔 영혼을 정화한 후 선을 향한 의지를 실천하며 마침내 지극한 사랑에 이른다. 이처럼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마음의 천국은 순수한 사랑 속에 깃들 것이다.

세상은 살기 어렵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때때로 잘못을 저지르고 허물도 남기며 살아간다. 그래도 이 모든 가슴 아픈 기억과 힘든 삶을 위로해 주고 새로운 희망을 주는 것은 오직 진실한 사랑뿐이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끝까지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그것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황적화 변호사
● 법무법인 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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