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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처분사건 잔혹사


와튼스쿨 조직심리학 교수인 애덤 그랜트는 자신의 저서 『오리지널스』에서 일을 미루는 행위가 (통념과 달리) 독창성 · 창의성을 발휘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논증하였습니다. 실험에 따르면 일을 미루는 과정 그 자체, 즉 단순히 게임을 하거나 휴식을 취한다고 하여 창의성이 향상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창의성을 발휘해야 하는 대상을 머릿속에 담아둔 채로 게임을 하는 등 할 일을 의도적으로 미루는 경우에만 창의성이 향상되었다고 합니다.

1927년 러시아의 심리학자 블루마 자이가르닉(Bluma Zeigarnik)은 사람들이 완성된 작업보다 미완성 작업에 대해 더 잘 기억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는데, 사람들은 작업이 일단 마무리되면, 더 이상 그 작업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을 중단한 채로 내버려 둘 경우, 그 일에 관한 생각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독창성과 창의성이 극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창의성이 요구되는 업무가 주어질때, 그리고 그 업무를 위해 약간의 여유 시간이 주어질 때는 위 방법을 활용하곤 합니다. 법리가 얽히고설킨 사건의 첫 서면을 써야 할 때, 첨단 기술 분야에 관한 법률자문 요청이 들어왔을 때면 빠르게 문제가 되는 사항들을 파악한 후 의도적으로 다른 일을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출근길 지하철 전동차 안에서 전쟁사에 관한 유튜브 영상을 보다가 문득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조금 더 참신한 주장과 논거가 머리를 스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변호사가 되고 정식으로 처음 맡았던 소송사건인 방송금지 가처분사건에서는 조금의 시간적 여유도 갖지 못했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모 그룹 회장이 자신에 대한 비리 의혹 보도를 막기 위해 신청한 사건이었고, 저는 피신청인인 방송사를 대리하게 되었습니다. 가처분신청서가 송달되자마자 다음 날 심문기일이 잡혔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함께 사건을 담당하던 선배변호사님과 역할을 나누어 제작진과 회의를 하고 방대한 자료를 받은 후, 완성도보다는 스피드에 방점을 두고 자료를 얼기설기 조합하여 가까스로 읽어볼 만한 답변서를 완성해냈습니다. 시간이 없어 출력본을 가지고 가야 했는데, 야속하게도 복합기가 말을 듣지 않아 겨우 출력한 후 발을 구르며 택시에 몸을 던지듯 타고 급히 출발했던 기억도 디테일하게 남아있습니다.

가처분 심문기일에 소요된 시간은 매우 길어서, 그 이후 꽤 많은 재판에 출석했음에도 아직도 그 기록을 깨지 못하였습니다. 심문기일 진행 시간만 약 120분이 소요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당시 조그만 법정 안에서 벌어진 말의 난투극은 살벌하게 펼쳐졌습니다. 중세 결투재판의 긴장감이 이런 것이었을까요, 방송이 되면 회장직에서 불명예스럽게 내려와야 할지도 모를 신청인의 절박함과 방송이 금지되면 당장 몇 시간 뒤 방송 편성을 바꿔야 할 뿐만 아니라, 수개월 이상의 취재 결과가 물거품이 되는 피신청인의 결기가 벼랑 끝에서 맞붙는 법정은 조조와 손권의 적벽이었고, 소련과 나치 독일의 스탈린그라드였습니다. 이때의 긴장감은 ‘신께서 옳은 자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라는 결투재판의 종교적인 믿음이 없이는 해소되지 않을 것만 같았습니다.

가처분 신청은 기각되었고, 바로 몇 시간 뒤 시사 프로그램과 뉴스에서 해당 사건이 그대로 방송되었습니다. 신청인의 회장직 사임 소식도 연이어 들려왔습니다. 변호사로서 개인적인 첫 승소가 이렇게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뉴스로 보도되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재판의, 변론의, 법의 위력이 무엇인지 무섭게 경험한 첫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조금의 시간적 여유도 없이 가까스로 대처한 사건이었던 만큼, 급박하게 돌아갔던 사건 전반을 하나씩 복기하면서 그와 같이 촉박한 유사 사건을 맡게 될 경우 어떻게 서면을 쓸지, 자료는 어떻게 확보하여 배열할지에 대한 나름의 프로세스를 정립한 결과, 이후에 맡은 유사 사건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몰려드는 각종 자문과 계약서, 소송 건을 처리하면서 시간 여유를 갈구하지만, 그것이 창의성을 위함인지 육체의 안락을 위함인지 가끔은 헷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게 몰아치듯 일을 주시는 상급자들께는 언제나 다빈치의 다음의 말을 들려드리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천재성을 지닌 사람들은 일을 가장 적게 할 때, 가장 큰 업적을 달성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그들은 독창적인 생각을 한 뒤, 머릿속에서 완벽해질 때까지 그 아이디어를 다듬기 때문이다.”

다빈치의 위 명언의 주어가 ‘천재성을 지닌 사람들’만 아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요. 천재성 없는 변호사 1인인 저는 오늘도 여러 건의 계약서를 보고 회의를 하며 녹초가 되어 주말만을 기다립니다. 정오의 태양이 뜰 때까지 침대에서 꾸물거리며 꾸는 꿈속에서 제가 쓴 서면이 안토니오 가우디의 천재성 어린 건축물처럼 빛나길 바라면서요.
 

김주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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