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법원 국선전담변호사로서 형사사건을 맡아온 지 5년째다. 사법연수원을 갓 졸업하고부터 내게 오는 사건들은 ‘세상에 이런 일이’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나 나올 법한 어마어마한 것들이었고, 기록을 읽다가 흠칫 놀라는 일 또한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한테 기가 꺾인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나름 당찬 성격인데도, 접견실에서조차 살기를 뿜어대는 피고인을 만날 때면 식은땀이 절로 나기도 했다.
범죄수사극에는 냉혈한이나 사이코패스가 범죄자로 자주 등장하지만, 지난 5년간 오히려 남녀관계만큼이나 쉽게 범죄의 원인이 되는 것이 없다는 걸 절절하게 느낀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많은 경우 부부나 내연, 아니면 애인 등 남녀관계였다가 파탄이 난 사이였다. 정말 사람은 잘 만나야 하고, 인연은 소중하게 가꿔야 한다는 말을 실감한다.
이런 관계는 증인으로 불러 신문하거나 합의할 때 난감한 상황이 생기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둘 사이의 관계가 만천하에 드러날까 전전긍긍하고, 그새 생긴 새 애인이 중간에서 훼방을 놓기 일쑤다. 증인 신문을 할 때는 법정이 울음바다가 되기도 한다. 물론 이 눈물이 악어의 눈물일 때도 있지만... 아무튼 남녀관계의 끝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검사 출신 사업가가 알고 보니 영어 강사
그렇다면 한때는 둘도 없던 사이가 어떻게 해서 극단적으로 틀어지게 될까. 우선 금전적으로 얽히는 경우다. 사이좋을 때 투자하거나 돈을 빌려 줬다가 관계가 틀어지고 돈도 못 받게 되는 경우가 있고, 일부러 접근해 돈을 뜯어내는 경우도 많다. 첫해 특정 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사기 사건이 왔다. 피고인은 법대를 나와 영어강사를 하며 힘들게 지내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피고인은 부모가 법조인이고 자신은 사법연수원 졸업 후 검사로 임용됐다가 지금은 옷을 벗고 사업을 한다고 여자를 속였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여자의 수준에 맞추기 위해 피고인은 삼성동 오크우드호텔 펜트하우스까지 임대해 여자와 동거했다. 한 번에 150만 원 하는 리무진을 불러 청담동 갤러리아백화점으로 명품 쇼핑을 다니기도 했다. 여자는 잘생긴 얼굴에 속아 몸도 마음도 잃었다며 펄펄 뛰었다.
그런데 막상 만나본 피고인은 “사랑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를 붙잡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고. 피고인은 잠시 사법시험을 공부할 때 알고 지냈던 이들에게 동명이인의 합격자를 자신으로 사칭하며 돈을 빌려 여자와의 화려한 생활을 유지했다. 실제 여자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는 피고인과 함께 지낼 때 찍은 화려한 사진들이 실려 있었다. 피고인은 밤낮으로 개인과외와 학원 강의를 뛰어 생활비를 충당하면서도, 피고인에게 삼성동 글라스타워를 인수하려 한다며 투자비를 받아내는 등 범행을 반복했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제3의 피해자까지 만들었지만, 피해액 대부분이 여자 앞으로 돌아간 것 역시 사실이었다. 피고인은 사기로 얻어낸 돈을 모두 자신의 통장에 넣어 놓고 생활비, 유흥비, 그리고 쇼핑비 등으로 대부분 여자와 함께 썼다. 필자는 편취금액에 대한 사실 오인 및 양형 부당을 항소 이유로 잡고 편취액수를 어떻게든 줄여 보고자 여자의 미니홈피와 블로그 내용, 신용카드 사용내역 등을 증거로 제시해 다투었다. 여자를 증인으로도 신청했는데, 이미 새로운 물주(?)를 만나 외국에 나가 새 삶을 시작한 뒤였다. 필자는 피고인이 밤낮으로 일하던 개인과외와 학원 수입을 소명하고 부모와 지인들의 탄원을 받아 정상 참작을 호소했다. 결국 이런 점들이 참작되어 피해금액이 대폭 축소돼 감형 받을 수 있었다.
“애들이 내 편만 들어줬어도…”
남녀관계가 파탄나면서 말싸움 끝에 살해하거나 상해를 가하는 일도 흔하다. 이런 경우 그 어떤 관계보다 수법이 잔혹할 때가 많다. 그 행위 안에 담긴 원한의 의미는 당사자들 아니면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싶다.
최근에는 일흔 넘은 피고인이 살인죄로 9년형을 선고받고 왔다. 전과도 없고, 한평생을 성실히 살아온 사람이 하루아침에 감옥에서 생을 마무리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원인은 황혼이혼. 부부가 오랫동안 대구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다 그만뒀고, 은퇴 후 아내의 사교활동을 두고 마찰을 빚었다. 아내는 육십 평생 남편 뒷바라지만 했으니 이제 자신의 삶을 즐기겠다며 등산회 등 사교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로 매우 보수적인 피고인은 이런 부인의 행동이 몹시도 못마땅했다. 아내의 모임에서 남녀가 어울려 노는 것을 목격하고는 크게 다투기도 했다.
아내는 결국 이혼소송을 제기하고 막내딸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피고인은 이혼소송 과정에서 자녀들이 모두 어머니 편만 든다는 사실에 크게 충격을 받았고, 자신도 막내딸 집으로 들어가 지내면서 아내를 설득하고 다투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아내는 이런 남편을 질려하며 식사와 빨래도 남편 것만 빼고 하는 등 피고인을 유령 취급했다. 참다못한 피고인은 어린 손자가 잠들어 있는 막내딸의 집에서 아내의 가슴과 음부를 칼로 난자해 살해했다. 그리고 그 길로 경찰서로 향했다. ‘내가 마누라를 죽였소….’
첫 만남에서 피고인은 죽고 싶다는 말을 반복하면서도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원망을 숨기지 않았다. ‘애들이 내 편만 들어줬더라면’, ‘아내가 딴청만 피우지 않았더라면’ 접견 내내 우리네 아버지들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쌍방항소사건이라 어떻게든 유리한 양형자료를 찾아야 했지만, 자녀들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나마 막내딸 부부만이 자신들이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중재했었어야 했다고 후회하고 있었다. 이들을 설득해 탄원서를 제출하고 자수하기 전에 아내와 함께 죽으려 했다는 정상을 소명하며 선처를 호소했다. 그러나 피고인은 오히려 원심보다 가중된 형을 선고받았다.
결과를 듣고 참담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피고인에 대한 안타까움이 큰 만큼, 변호인으로서 자괴감도 컸다. 가족을 위해 평생 돈을 벌어다 줬지만 나이 들어 경제력이 없어지자 가정에서 소외되는, 이 시대의 가장(家長)의 모습이 보여 어떻게든 도와 주고 싶었지만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인내하며 사랑한다면
현실은 영화나 TV드라마와 다르다. 형사법정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마땅히 격리되어야 할 사이코패스인 경우보다는, 우리의 아버지, 남편, 혹은 한때 사랑했던 사람인 경우가 많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예의를 갖추라는 말이 있다. 한 발 양보하고, 입장 바꿔 생각하고, 그리고 인내하며 사랑한다면 형사법정에서 애증과 가책의 눈물이 흐를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김영운 변호사
사법시험 제49회(연수원 39기)
서울고등법원 국선전담변호사
법률사무소 옆 책방, 책방 옆 법률사무소 - 변호사 하기 싫어서 서점 차린 김소리 변호사 인터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