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시선으로부터,』는 정세랑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한 변호사님의 우연한 추천이 없었다면, 넷플릭스에서 정주행했던 <보건교사 안은영>은 알아도 그 원작 소설이 있었는지, 그 작가가 정세랑인지 모르고 지냈을 것이다. ‘늘 사건 기록을 보아서 더 이상 뭘 읽기 싫다’고 핑계 대며 얼마 남지 않은 근육도 흘려보내며 영상에 몰입하여 지내다가 오랜만에 골무 없이 실물 종이책의 사그락거리는 감촉을 그대로 느끼며 소설을 읽었다. 페이지마다 가득한 밀도 있는 말들을 쉽게 삼키기 어려워 시간이 걸렸지만, 어느덧 나만의 속도로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 가니 하와이 어느 따뜻하고 한적한 바닷가에 멋진 어른과 함께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용암분출로 갓 태어난 땅을 혼자 천천히 걷다 생명력 강한 레후아 꽃을 발견하는 것처럼 평온하고 새로운 기분이 들었고 내가 조금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시선으로부터,』라는 제목을 보고 ‘사람들의 시선(視線)’을 말할 때 그 시선인 줄 알았다. 여러 복합적인 의미가 있을 수 있으나, 『시선으로부터,』는 ‘심시선’이라는 한 여성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이다. 심시선은 자신이 죽으면 제사를 지낼 필요 없다고 하였으나, 십 년째 되던 해 큰딸이 하와이에서 딱 한 번 제사를 지내자고 이례적인 제안을 하였고 가족들 각자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와서 그 순간들로 제사상을 차리는 여정이 이 소설의 큰 줄기이다. 12명의 가족이 어머니이자 할머니인 심시선을 추억하며 그녀가 좋아했을 것 같은 가장 멋진 순간을 각자의 스타일대로 은근 경쟁심 돋게 준비하는 과정은 마치 하와이에서 보물찾기같이 흥미진진하다. 가족들은 심시선을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던 사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 내던 사람’이라 기억한다. 그런 심시선을 위해 후손들이 차려 주는 ‘아름다운 순간들’로 가득한 제사상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의이며, 나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차리고 싶고 또 받고 싶은 그런 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12명의 가족들 중에는 미술작품 복원가, 고고학자, 크리처 아티스트, DJ 등 낯선 직업의 인물들도 있는데, 이들의 개성 있는 삶의 경험들은 하와이만큼이나 이색적이고 신기하다. 여행이라는 것이 잠시 일상을 떠나올 뿐 아주 떠나올 수는 없듯이 그들이 두고 온 일상에는 염산테러와 딥페이크 성범죄, 착취적인 기업 생태계, 환경오염 등 우리가 직면한 무거운 문제들이 있고 이에 대한 고민이 소설에는 섬세하게 녹아 있다. 331페이지를 다 넘기면 개인, 사회, 역사 그리고 환경에 대하여 이 소설이 다루는 스펙트럼이 얼마나 광범위한지 감탄하게 된다. 작가가 왜 이 소설을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여과해 낸 ‘모든 것의 이야기’라고 하는지 알 수 있다.

 이 소설의 31개 에피소드는 심시선이 쓴 과거의 에세이나 녹취록의 단편들로 시작하는데, 그 부분에서는 마치 삶의 질곡을 견디고 돌파해 낸 심시선의 육성을 듣는 것 같다. 또 각 에피소드 안에는 가족들이 기억하는 심시선과의 일화가 담겨 있는데, 심시선의 육성과 가족들의 기억 조각들에서 심시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지고 살아냈는지를 점차 알게 된다. 소설을 마칠 때쯤에는 기댈 수 있는 매력적이고 든든한 어른, 심시선이 나에게도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런 그녀가 나에게는 ‘20년만 버텨봐. 멋진 도약이 있을 거야’라고 격려해 주는 것 같다.

 이 소설에서 독일 회화 거장이 그렸다는 심시선의 초상화, 그 제목이 ‘마이 스몰 퍼키 하와이안 티츠’인 초상화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된다. 하와이는 과거 심시선이 한국전쟁 이후 사진 신부로 가서 잠시 살았던 곳이자, 소설 속 현재에서는 세월을 거슬러 수면 위로 나타난 그 초상화가 전시되는 곳이기도 하다. 초상화 안에서 청록색 퍼 워머만 걸친 나신의 젊은 심시선은 화가의 요구와는 무관한 듯한 뾰족한 얼굴, 자기 삶을 계획하는 얼굴, 가진 것이 없이 비극에서 시작해도 뭔가를 이루고 말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초상화를 상상해 본다. 그 초상화 앞에서 나는 심시선과 같이 벌거벗겨졌으나, 마음엔 갑옷을 지어 치욕의 시대를 살아 낸 여성이 되어 보았다가, 초상화를 그리고 그런 제목을 붙인 거장을 미워하는 자녀가 되어 보았다가, 초상화 구석에서 박새(영어로 티츠)를 발견하는 손녀가 되어보기도 한다. 나도 작가처럼 현재 살아가는 자리의 계보에 대해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아직 나는 가 보지 않은 하와이. 코코퍼프도 먹고 싶고, 프리다이빙과 훌라도 배우고 싶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니 자연에 대한 애정으로 선크림조차 바르지 않는 로컬, 착취적이지 않은 진짜 삶을 꾸려가는 그들을 존중하는 방문객이 되려면 어떤 방식이어야 할까 고민해 보게 된다. 삶에 대한 나의 시선을 점검해 보고 새로운 시선을 얻어 보고 싶은 이들, 하와이를 가 보고 싶은 이들에게 이 소설을 권한다.

박승길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