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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자의 고뇌


 “눈이 나빠 글씨가 잘 안 보여서... 나와서 보겠습니다.”

 지난달 5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김학의 불법출금’ 공판. 증인으로 나온 출입국공무원 A씨가 증인석을 벗어나 방청객 쪽 모니터로 왔습니다. 검찰이 제시한 실물화상기의 글자가 잘 안 보였던 그는 안경을 들어 올리며 얼굴을 찡그린 채 2년 전 동료 단톡방에서 있었던 대화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2019년 당시 법무부 검찰과거사위가 재조사 대상으로 꼽았던 김학의 전 차관이 해외 출국 가능성이 있는데, 출국금지가 되지 않았다는 언론 기사 등이 담겨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진상규명을 지시한 상황에서 만일 그가 출국하기라도 하면 법무부가 큰일날 분위기였지요.

 방청석에 있는 취재기자는 좀처럼 증인의 얼굴을 볼 일이 없습니다. 증인이 방청석을 등지고 재판장과 마주보고 앉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증인이 모니터로 오는 바람에 모처럼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A씨는 김 전 차관이 출국을 시도했다가 긴급 출국금지를 당한 2019년 3월 22일 당시 출입국심사과장이었습니다. 이날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대검 과거사 진상조사단 검사로부터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김 전 차관 출국금지 요청을 받았습니다. ‘사진으로 된 긴급 출국금지 요청서를 문자로 받고 출국금지를 승인한 적 있느냐’는 검찰 질문에 ‘한 번도 없었다’고 답했습니다.

 그는 ‘문자메시지로 받은 것이 공문서로서 효력이 인정될지 걱정했다’며 ‘문자메시지로 접수하는 과정에서 저도 판단하기가 상당히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문자는 상관인 출입국본부장의 지시로 해당 검사와 통화한 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차적인 의논 상대는 직속상관입니다만, 금요일 밤 ~ 토요일 새벽에 직속상관은 부재중이었습니다.

 문자를 받고 고민하던 A씨는 본부장의 지시에 따라 토요일 새벽 자택 근처로 서류를 들고 갑니다. 이후 실무적으로 필요한 일들을 처리합니다. 당시 출금을 승인한 본부장과, ‘문자’를 보낸 검사는 김 전 차관을 불법으로 긴급출금을 한 혐의로 기소돼 있습니다. 그는 그들의 재판에 증인으로 온 것입니다.

 구부정한 자세로 모니터 앞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그의 모습에는 이런 상황이 오버랩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단지 글자가 안 보여서만은 아니겠지요. 상사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는 중간관리자의 위치와 자칫 ‘범법’의 책임을 질 수도 있는 위험 앞에서 수없이 고민했을 것입니다.

 재판을 방청하다 보면 이 같은 ‘중간자’들의 고뇌를 다양한 형태로 접하게 됩니다. ‘울산 선거개입 재판’에서는 보건복지부 A사무관이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같은 부서 주사 B씨와 주고받은 메시지가 공개됐습니다. “울산 공공병원 지어야 한대요. V(청와대)가 얘기한대요. 정권 바뀌어도 찍어 누르는 것은 똑같아요.” 이에 B씨가 답합니다. “복지부 아무런 준비 안돼 울산 공공기관 죽어날 거예요.”

 두 사람이 주고받은 문자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B씨가 “울산 병원 또 검토 중이신 것 같은데, 진짜 언제까지 갈지.”라고 하자 A씨가 “오늘 중으로 마치는 게 목표예요.”라고 합니다.

 울산 선거개입 사건의 기소 내용 중에는 청와대가 미는 후보의 당선을 위해 당시 유력 후보의 공약을 무산시키고 공공병원 설립을 추진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일로 당시 청와대 사회정책비서관 등이 기소됐습니다. 검찰이 제시한 문자 내용은 청와대로부터 ‘공공병원 설립’ 검토 요구를 받은 해당 부처 실무자들의 고충과 속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이들 ‘중간자’들의 상황은 보통의 사람들이 맞닥뜨릴 가능성이 그나마 높은 갈등 국면이 아닐까 합니다. 상사의 지시가 통상적이지 않고 위법의 소지가 있는 경우, 불이익을 감수하고 지시를 거부해 ‘의인’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엄격한 상명하복이 지배하는 공무원 사회에서 쉬운 길은 아닙니다. 결국 상당수는 지시를 따르는데, 가담 정도가 큰 경우 상관과 함께 피고인석에 섭니다. 앞선 두 경우는 위법을 인식하고 협력한 경우는 아니어서 법정에 증인으로 서거나, 대화가 증거로 제출되는 데 그쳤습니다.

 국가공무원법 제57조는 “공무원은 직무를 수행할 때 소속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라고 돼 있습니다. 한때 ‘상사의 지시가 위법한 경우 따르지 아니할 수 있고, 이로 인해 어떠한 인사상 불이익도 받지 아니한다’는 단서를 추가하자는 논의를 했지만 없었던 일로 됐습니다.

 간결하지만 결코 간결하지 않은 ‘복종 의무’ 조항, 그 앞에 A씨와 같은 중간자들의 고민은 깊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양은경 변호사
● 조선일보 법조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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