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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펜서>와 몸


‘통속’ 또는 ‘다큐’?

 심야에 <스펜서>를 봤다.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빈과 그 가문(House of Spencer)을 의미한다. 통념에 기대곤 하는 내게 ‘다이애나’라면 둘 중 하나였다. ‘통속’ 아니면 ‘다큐’?

 감독은 단 사흘 성탄절 왕실에 처한 ‘몸’의 격동을 그렸다. 맥락은 생략되고 서사는 절제했다. ‘몸’의 이미지로 가득했다. 극도로 긴장하고 날 선 ‘몸’, 분열하고 붕괴되는 ‘몸’이다.

 그 ‘몸’이 처한 곳은 영국 왕실이다. 자본의 재영토화로 분열된 세계, 군주와 공화의 틈새 위태로이 기생하는, 근대 국민국가체제와 불화하는 이곳에도 치열한 생존 기제는 작동될 터, 왕실에 들어온 자 그에 따라야 하리라. <스펜서>는 그 안의 ‘몸’을 세심히 그린다.

아픔 없는 판타지의 몸들

 아들 손잡고 ‘액션 히어로물’을 많이 봤다. 미사일이 축포처럼 터지고, 우리 편은 강력한 힘을 분출해 기어코 상대를 가른다. 우연히 사소하게, 갤럭시에 떠도는 압도적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그 채굴과 사용 중의 희생과 어느 세계의 붕괴는 암시조차 되지 않는다.

 아들 얼굴에 어리는 이 판타지 세계에 조마조마했다. 문화비평가 커트 앤더슨은 미국을 ‘판타지 랜드’로 규정한다. 미국 대중사회는 음모론, 괴력난신, 트럼프류 반(反) 지성이 넘치는 곳이기도 하다. 총으로 무장하고 쏠 당당한 자유를 ‘소유’함으로써 관념을 넘어선다.

 마틴 스콜세지의 언급대로, 이제 영화관은 생생한 체험을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놀이동산이 되었다. 의미를 거세시킨 스펙터클 영상들로 감각을 육박해 온다. 첨단기술로 입혀진 이 감각과 수백만 년 축적된 몸의 감각 사이 괴리는 무엇을 의미하게 될까? 몸의 진실을 초월한 관념, 형이상학은 이미 2천 년 넘게 재능을 낭비해 온 서양철학의 한계였다. 아직 그 극복 의지는 지리멸렬하고, 이 관념론의 잔재는 판타지의 세계와 쉬이 손잡는다.

 나는 <스펜서>에서 이원론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엿봤다. 그래서 ‘통속’도 ‘다큐’도 아닌, 부서지는 ‘몸’을 소실점에 배치하는 길을 택하였을 것이다. 소실점의 미학이 지배 욕망에 충실한 근대기획의 일환이라는 비판에 대한 고려가 없었을 리 만무하다. 다만, 그 중심 자리에 왕좌 대신 ex-princess(‘다이애나’)를 배치해 전복을 꾀해 본 것이리라.

‘몸’을 향해 쏟아지는 타자의 시선들

 사르트르의 ‘타자론’은 서구 철학사상 타자에 관한 독창적이고 위대한 이론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문학 속에도 스며있다. <스펜서>의 감독 역시 그와 동일한 시도를 한다.

 수행원들과 왕세자는 ‘다이애나’에게 계속해 주의를 준다. 파파라치를 피해 창문 커튼을 열지 말 것! 파파라치의 시선은 ‘몸’을 약탈하는 시선이다. 타자의 시선은 이에 와 닿는 모든 것을 객체화시키는 메두사의 눈이다. 타자가 낸 균열을 통해 나의 세계가 끊임없이 유출되고 와해된다. 타인을 나의 지옥으로 규정하는 이유이다.

 인간은 늘 주린 존재이다. ‘결여’ 상태의 의식을 채워가야만 하는 실존 조건을 선고받았다. 대중은 스타를 숭배함으로써 공허함을 채우려 한다. 파파라치는 몸(이미지)을 사냥해 대중에 제공한다. ‘다이애나’는 왕실에 속한 몸, 그 ‘몸’이 사냥꾼의 표적이 되는 것은 왕실세계의 유출이다. 결코 용납될 수 없고, 커튼은 철사로 봉쇄된다.

 정작 ‘다이애나’에게 더 지독한 그늘을 지우는 시선은 왕세자(지배권력)로부터 온다. 그녀의 세계와 주체는 잠식당해 붕괴 일보 직전이다. 대중은 타자의 시선이나 동시에 그녀를 People’s Princess로 부르던 애정의 시선일 수 있다. ‘다이애나’는 절단기로 철삿줄을 끊어 버린다. 세계의 중심을 뺏은 시선과 재탈환하려는 시선 사이의 격돌이 예고된다.

 ‘타자론’은 정교하고 풍부하다. 타자의 시선으로 내가 즉자화됨으로써 내 존재 근거가 마련될 수 있고, 이로써 사랑의 관계가 가능해진다. 불행히 실패의 싹이 내재한다. 사랑의 응답으로 고백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자유 · 주체성을 포기하며 객체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대문자 Ⅰ의 ‘주체’를 알지 못했던 내게 이 집요한 시선해부학은 소름 끼치는 데가 있다. 배후에 있음 직한 야수의 눈(<아이리시맨>, <시카리오>의 그 눈들)도 거슬린다. 서양식 ‘주체’가 무언지 모르면서, 그 ‘객체’인 소유 관념을 이식받고 이를 발판으로 비로소 ‘주체’를 상상하게 되는 주객전도의 역사 속 이 지연 배송된 해부학을 오려 붙여본다.
 


왕실인간 만들기 프로젝트의 종착점

 <스펜서>에 ‘왕실 꿩’과 ‘천 일의 앤’이라는 알레고리가 배치돼 있다. 첫 장면, 죽은 ‘꿩’ 위로 군용차량들이 내달린다. 왕세자의 사냥감으로 사육된 왕실재산이다. 왕실에 속한 두 개의 ‘몸’, 즉 ‘꿩’과 ‘앤’이 가리키는 곳에 ‘몸의 죽음’이라는 기의가 어른거린다.

 <스펜서>가 미셀 푸코의 ‘몸’을 고려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푸코는 선험적 인간 조건을 논하는 칸트식 인간 이해를 거부했다. 근대 개인들은 역사적으로 결정된 존재로, 담론과 권력작용의 산물이다. 왕실은 푸코의 ‘몸’을 교과서적으로 재현해 보이기 안성맞춤이다. 왕실 속 ‘몸’을 회유하고 처벌하는 미시 권력 그물망은 효과적으로 재현된다. 이로써 영화 초반부 ‘다이애나’가 길을 잃은 이유가 소급하여 해명된다. ‘다이애나’는 피시 앤 칩스를 파는 대중식당에 내려 묻는다. “Where am Ⅰ?” 진정 길을 잃은 것인가, 왕실로의 진입을 거부하는 것인가?

 ‘다이애나’는 여왕보다 늦게 왕실로 진입한다. 그 ‘몸’을 향해 억압하고 생산하는 규율과 기술은 맹렬히 작동한다. 수행원이 밀고 들어오는 형형색색 거대 옷더미는 단 하루치이다. 분 단위로 지정된 행사별로 입어야 할 옷들의 순서와 코드가 정해져 있다. 푸코가 제시한 파리 소년감화소의 촘촘한 규정 · 시간표를 통한 근대 신체 규율 기획에 대응된다.

 순종치 않는 ‘몸’이 돌아갈 자리는 없다. <박하사탕>은 사실적으로, <달콤한 인생>은 낭만적으로, <예수>는 우화적으로 이를 말한다. 참수된 ‘앤’과 사냥당한 ‘꿩’의 운명이 ‘다이애나’를 기다린다. 종국적으로 ‘몸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마침내 ‘앤’의 죽음을 딛고, ‘꿩’을 향한 왕세자의 격발을 ‘몸’으로 막아낸다. 사르트르는 죽음까지도 선택할 인간의 자유를 논변한다. 이 ‘자유’가 <스펜서>와 만나는 대목이다.

‘윈저’와 ‘스펜서’ 가문의 ‘아비투스’ 대결

 아비투스(개인의 무의식적 취향)는 양육 · 교양의 산물이고 계급적 세계관으로 결정된다. ‘다이애나’와 왕세자는 신분이 다르므로, 아비투스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인간행위 근원을 이해하려면 기억, 관습, 감정과 같은 요인들을 아울러야 한다. 선험적 이성(이원론)이 아닌 몸과 그 취향을 통해 인간은 이해될 수 있다.

 ‘다이애나’의 행동과 선택이 암시하는 아비투스는 왕실 아비투스와 충돌하며 중력파를 일으킨다. 영화 속 교차하는 바로크와 재즈의 선율은 그 파동의 여운이다. 결정적 저항의 힘은 <스펜서> 가문의 정체성(즉, 아비투스)에서 불어온다. ‘다이애나’는 허수아비에 걸린 부친의 낡은 옷을 고쳐 입고 시선을 회복한다.

 브루디외도 ‘선험적, 자율적 인간’상을 거부한다. 그는 프랑스 국가권력기관을 조사하여, 최우수 성적의 학생들이 진학하는 엘리트 양성기관 출신이 대부분 그 자리를 점하고, 90% 이상이 상층이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여전히 프랑스는 신분적 질서가 지배한다. 유럽인들의 세계에선 이 아비투스의 쟁투가 뿌리를 지닌 생생함으로 감각되는가 보다.

정치적 올바름의 투쟁, 그리고 ‘피해자 배틀’?

 <스펜서>를 보는 내내 ‘몸’의 묘사와 충만함이 일렁거렸고, 금세 풍부한 예술적 의미를 ‘소유’할 것만 같았다. 얼마 후 감각 가득하던 벚꽃들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여성과 동양인을 주인공으로 세워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하는 디즈니 영화류와 차이를, 몸의 철학들로 엮은 이 작품을 통해 총체성의 시각을 얻을 수 있는지 잠시 생각해 본다. 그리고 정체성에 몰두하는 나르시시즘적 자아들이 ‘피해자 배틀’을 벌이는 동안 공론장이 무너지고 있다는 논쟁적 지점도 상기해 본다.

 <스펜서>의 마지막 장면. 아들과 탈출한 ‘다이애나’는 들뜬 얼굴로 KFC 패키지를 사 온다. 여전히 그 ‘몸’은 프랜차이즈로 표상되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 거할 뿐이다. ‘예술’과 ‘경제’가 통합된 이곳, <스펜서> 역시 문화 ‘상품’ 아니던가?\

변호사의 눈

 역사적 맥락을 잃은 구분 · 배제, 자격 확인의 동어반복체계인 실정법에만 골몰하게 되는 현실은 꽤 답답하다. 우리의 눈은 개별적 몸, 자격 투쟁하는 몸에 보다 적합하다. 어쩌면 몸에 별 관심이 없을지 모른다. 실정법은 논쟁이 시작되어야 할 시점에 선언하고, 궁구해야 할 지점에서 정의해 버린다. 총체적 시각이 불가능한 필연적 이유이다. 아렌트에 의하면, 일상성은 무해(無害)함의 동의어가 아니다.

 

양동운 변호사
● 법무법인 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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