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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변호사의 조언] 최승재 변호사 인터뷰

인터뷰/정리 : 박형연 본보 편집위원

최승재 변호사. 화려한 이력으로, 법조계의 중심부에 위치한 인물이다. 서울대 졸업과 미국 콜럼비아 로스쿨 유학과 서울대 박사, 삼성SDI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사내변호사, 경북대 로스쿨 교수, 김앤장 변호사, 대법원 재판연구관, 인기있는 책의 저자(미국 대법관 이야기, 변호사전), 서울지방변호사회의 국제이사 등등. 다들 부러워할 만한 직장이고 경력이다. 그런데 그의 경력을 더 자세히 보면 변방의 냄새가 난다. 지방 출신이고, 서울대 법대가 아닌 비법대 출신, 판사, 검사 경력이 없다는 점 등은 그의 변방성을 보여 준다. 그리고 다양한 경력은 삐딱하게 보면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직장을 옮겨 다녔다는 느낌도 준다. 사실 최 변호사뿐만 아니라 관점에 따라 한 사람이 중심부의 인물이 되기도 하고, 변방의 인물이 되기도 한다. 최 변호사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이렇게 보면 중심부의 인물이고, 저렇게 보면 즉 입장을 바꾸어 보면 세상의 변방에 서 있는 느낌을 주는 그를 인터뷰한다는 것이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실제 그와 인터뷰를 하면서 사실 오래전부터 그를 알아왔지만 내가 정말로 최승재의 진가를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여러분들과 함께 최승재가 살아온 세상, 그리고 앞으로 꿈꾸는 세상에 대하여 같이 한 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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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재 변호사 약력
서울대학교 학사, 석사, 박사(특허권남용의 경제법적 규율)
서울시립대학교 법학박사 수료(조세법)
미국 콜럼비아로스쿨 LL.M.
전 삼성에스디아이 변호사
전 마이크로소프트 변호사
전 대법원 재판연구관
전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전 김장법률사무소 변호사
전 서울지방변호사회 국제이사
현 대법원 재판연구관
현 법무부 변호사제도개선위원회 위원




지난달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변호사 傳』으로 북콘서트를 했습니다. 작년에 북콘서트 저자로 나온 홍준표 경남지사는 자신을 “오랜 기간 변방에서 머물다가 이제 중심부로 막 진입했다”고 말했는데요, 최 변호사님은 지금 변방에서 배회하고 있나요, 아니면 법조계의 중심에 서 있다고 생각하나요. 

저는 한 번도 제가 우리 사회의 중심부에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변방에서 성장했고 지금도 변방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를 든 홍준표 지사님과 비교하자면 그의 지향점, 즉 중심을 지향하는 변방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저는 중심을 지향하는 변방이 아니라 다양한 변방의 목소리를 내는, 스스로 변방의 가치를 존중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간혹 나는 과연 무엇을 지향하는지 자문하여 보는데, 저와 제일 어울리는 용어는 공부하는 사람, 즉 학인(學人)입니다. 학인은 조어(造語)이기 때문에 현실의 직업으로 제가 제일 불리고 싶은 직함은 변호사입니다. 지금 다시 대법원 재판연구관이 되었는데 동료 판사들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물어서 ‘변호사’로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변호사는 제가 가진 가장 자랑스러운 직책입니다. 제가 ‘변호사뎐’을 법률신문에 연재했던 이유도, 갈수록 자긍심을 잃어가는 우리 변호사들에게 변호사의 본질에 대한 탐구와 자존심을 회복시켜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서울대독어교육과에 들어가 법학을 부전공했습니다. 직설적으로 묻겠습니다. 비법대 법조인으로서 콤플렉스는 없었나요? 

사범대 지망은 집안의 바람이었습니다. 집안이 대부분 이과 출신입니다. 남동생도 한의사입니다. 저도 고2로 올라가면서 이과(理科)를 지망했습니다. 그런데 교감선생님이 신설학교인 모교를 위해서 문과를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신 이후 문과생이 되었습니다. 당시 주변에 법조인이라고는 없어서 정확히는 몰랐지만 문과에 간다면 법조인이 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집안에 경제적 여유가 없었고, 할아버지가 일제 시기 대구사범 시험을 합격하고 진학을 못 하신 것이 한(?)이 되셨는지 장손인 제가 사범대를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결국 집안 어른들의 뜻에 따라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지망했습니다. 고3 시절은 공부문제보다는 제가 가기 싫은 곳에 지원을 하는 이 문제가 더 문제였습니다. 당시 대입은 선지원 후시험이었습니다. 1지망으로 영어교육과를 지망했는데, 2지망인 독어교육과에 합격했습니다. 재수도 생각했으나 친척이 없는 서울에 와서 내 스스로 법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집안 어르신들 몰래 법학을 부전공하였습니다. 법학공부가 좋아서 했고, 법학교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법학공부를 위해서 한 독어 전공은 의도하지 않은 행운이었습니다. 

졸업 후 대학원(행정법 석사)에 진학한 것으로 아는데 왜 갑자기 사법시험을 치르고 변호사가 되었나요? 

석사 마지막 학기 제 박사 지도교수님이신 존경하던 권오승 교수님 밑에서 박사를 하려고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앞으로는 좋은 교수가 되려면 변호사가 되어 실무를 제대로 이해한 상태에서 학문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스승님의 말씀에 따라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대신 진로를 바꾸어 사법시험공부를 하게 되었고, 2년 뒤 39회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사법연수원에 들어갔습니다. 

연수원을 수료하고 삼성SDI에 사내변호사로 취직을 했습니다. 그 당시는 사내변호사가 흔한 시절은 아닌데,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늘 법학교수를 생각했습니다. 연수원에 들어가서도 그 지향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공부의 관심은 조금씩 달라졌는데 대학 때나 연수원에서는 헌법에 관심이 많아서 헌법재판소 근무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헌법은 공부할수록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1999년 미국 연수를 결정적인 계기로 특허법을 포함한 지적재산권법이나 제가 박사학위를 받은 공정거래법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결국 지재권과 공정거래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특히 로펌이 아닌 사내변호사로 가게 된 것은 연수원 때 했던 콤럼비아대학교 단기연수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사내변호사 개념도 별로 없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사내변호사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느낌으로 기업 사내변호사가 사건의 실체를 100을 경험한다면 로펌변호사는 걸러서 그 중 50을 경험하고, 다시 법원이나 검찰은 30이나 20만 이해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경력의 시작은 사내변호사가 좋다고 보았습니다. 사내변호사-로펌변호사-법원을 경험하고 최종적으로 다양한 실무경험을 한 교수가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마침 삼성에서 변호사를 공채했습니다. 그래서 삼성으로 갔고, 삼성계열사에서 서로 신입변호사를 유치하러 왔을 때 삼성전자는 국내변호사는 특허를 할 수 없다고 했지만, 삼성SDI는 특허법무가 법무 내에 같이 있어 특허나 지재권도 같이 할 수 있다고 해서 삼성SDI로 정했습니다. 

삼성SDI에 6년이나 잘 다니다가 마이크로소프트(MS)로 옮겼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삼성에 근무하던 2006년 초 MS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습니다. 그 당시 MS에서는 유럽과 한국에서 끼워팔기가 문제되어 공정거래위원회와 소송 중이었습니다. MS에서는 영어를 하면서도 공정거래법과 IT 분야에 대한 이해, 지재권에 모두 능한 변호사를 찾다가 저에게 영입제안을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세계 최고의 IT회사에서 일하면서 좋은 사건을 담당하게 되는 것은 매력적인 제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실리를 따지면 삼성에 있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되어 6개월 정도 고민을 했지만, 결국 모험을 택했습니다. 삼성에서는 당시 부장급이었다가 MS 임원으로 스카웃되어 지급받은 차를 타고 아내와 같이 드라이브를 했던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당시 MS의 General Counsel이었던 Brad Smith 변호사는 소송이 잘 마무리되면 미국 MS 본사에서 일하게 해 주겠다는 제안도 했었습니다. 한국변호사가 미국변호사들과 비교하여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미국 본토에서 보여 주고 싶은 욕심도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당시 루틴(routine)했던 삼성에서보다 공부를 많이 할 수 있는 자리라는 점이 매력적이었습니다. 김순택 부회장님(당시 SDI 대표이사)께서 계속 삼성에 있으면 곧 임원도 될 것이고, 큰일을 하게 될 것이니 남으라고 하셨는데 더 많이 배워서 다시 사장님을 모시겠다고 말씀드리고 사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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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에 2년 정도만 근무하다가 경북대학교 로스쿨로 옮겼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제가 잊을 수 없는 날짜가 있습니다. 2007. 9. 17.입니다. MS는 한국과 유럽에게 동시에 공정거래위원회와 소송 중이었는데 그날 유럽에서 모든 청구원인에 대해서 패소했습니다. MS는 유럽에서 더 이상 다투지 않기로 하였고, 더 큰 시장인 유럽에서 소송을 포기하다 보니 한국에서도 더 이상 소송을 유지할 이유가 없어져서 한국 소송도 소취하 하기로 했습니다. 공정위에서 처음에는 소취하에 부동의하다가 결국 동의를 해 주었습니다. 시작할 때 최소 4년 최대 10년 갈 소송이라고 했었는데 허망하게 판결문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소취하로 종결되었습니다. 
갑자기 제가 MS에 들어온 주된 이유가 없어지니 허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2007년 여름 로스쿨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교수 수요가 많이 늘어 제가 가고 싶어 하던 여러 좋은 대학에서 온 영입제안을, 소취하된 끼워팔기 소송을 마무리하여야 한다는 마음에 거절한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아내는 MS로 옮길 때나 대학영입제안을 거절할 때나 뒤에 김앤장의 영입제안에도 로스쿨 1기 제자들이 졸업하고 난 뒤에 가겠다고 하는 등의 현실적인 이해득실보다는 공부할 수 있는지, 명분이나 의리에 부합하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를 보고 제가 너무 낭만주의적이라고 걱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바로 저입니다. 이 상황에서 로스쿨로 가기로 했고, 2004년, 2007년에 이어 2008년 다시 영입제안을 해 준 경북대학교 로스쿨 IT법 교수로 가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꿈인 교수가 되었는데, 얼마 후 다시 김앤장으로 옮겼습니다. 교수가 적성에 맞지 않았나요? 

아닙니다. 실제 교수는 제게 가장 잘 맞는 직업이었습니다. 경북대학교에 있을 때 잠자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재미있게 공부했습니다. 매년 1권 이상의 책과 10편 이상의 논문을 썼습니다. 그렇지만 가족들과 떨어져 지방에 살면서 주말부부를 하는 것을 제가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아이들도 어린데 가족들과 떨어져 산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에게 아빠가 없어지는 것은 제 이기심의 부작용이었고, 스스로도 체력적으로 지쳐갔습니다. 주말부부를 하기로 한 것은 내 실책이었습니다. 그런 시점에 김앤장에서 영입제안이 있어 김앤장으로 옮겼습니다. 
김앤장에서 저와 같은 실무형 변호사가 아닌 학자형 변호사를 채용하기로 한 것을 보면서 왜 김앤장이 1위 로펌인지 알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김앤장은 지속적으로 연구하는 태도를 견지한다면 2위와의 간격을 유지하고 벌려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뿐 아니라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국제이사 제안이 왔을 때도 쉽지 않았을 것인데 허락하여 주었고,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가는 것도 환영해 주었습니다. 김앤장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이 자리를 빌려서 전하고 싶습니다. 업계의 1등은 남다른 데가 있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 재판연구관인데, 남들이 부러워하는 김앤장을 나와 다시 재판연구관이 되었습니다. 이유가 뭔가요? 

(웃으면서) 박 변호사님이 말하는 변방의 속성이나 집사람이 말하는 낭만주의적인 속성이 제게는 확실히 있습니다. 도전을 즐기고 끊임없이 배우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혁신하는 것입니다. 지금 재판연구관을 하면서도 선례가 없는 사건, 어려운 사건을 배당받게 됩니다. 저는 솔직히 그런 사건을 연구하는 것을 즐깁니다. 그것이 저의 역할이고, 몫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평생 연구하고, 공부할 운명인가 봅니다. 한편 가족들에게는 미안합니다. 제가 서울대 법대 출신이거나, 연수원에서 바로 판사나 검사로 갔더라면 제 인생이 달라졌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원래 저는 좋은 교수가 되기 위해서 사법시험을 본 것이기 때문에 이 모든 과정이 좋은 학자, 교수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른 이야기 좀 하죠. 사내변호사의 소송수행에 대하여 사내변호사와 개업변호사들 사이에 갈등이 심합니다. 이제 서울지방변호사회의 임원도 아니고, 사내변호사도 아닌 공무원입니다. 사내변호사의 소송수행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저는 항상 본질을 지향하는 편입니다. 현재 서울회에서는 사내변호사의 소송수행 건수를 10건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내변호사의 소송수행에 대해서 논란이 있습니다. 사내변호사에게 소송을 하게 하는 것이 사내변호사가 변호사로서 충분히 기능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여부를 생각하면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사내변호사라든지, 로펌변호사라든지, 개업변호사라든지 개별 단체의 이익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변호사 전체의 이익이라는 큰 틀에서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사내변호사에게 소송수행 기능을 빼앗은 것은 우리 스스로 변호사 전체의 힘을 축소하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소탐대실이죠. 제가 ‘변호사뎐’이라는 글을 법률신문에 연재하게 된 것도 변호사의 자긍심이 사라지고 있는 지금의 시대에 변호사란 과연 무엇이고, 무엇을 지향하여야 하는 것인가 하는 본질에 관심을 두자는 의도에서 목소리를 낸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존중하고 변호사 공동체 전체를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국제이사를 했습니다. 대한변호사협회가 아닌 서울회에 국가의 외교권에 해당하는 국제이사의 업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제 청년변호사들이 갈 곳은 해외진출입니다. 이것을 협회 차원뿐만 아니라 서울회에서도 지원해야하고, 필요한 업무이다. 대한변호사협회가 할 국제업무가 있고, 서울회나 다른 지방변호사회가 하여야 할 국제업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보완적인 기능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국제이사로 있을 때 최영익 대한변협 국제이사님으로부터 많은 조언과 협조를 받은 것처럼, 차기 집행부에서도 대한변협 국제이사와 서울회 국제이사는 서로 협조하면서 청년변호사들의 해외진출과 한국법조의 세계역량강화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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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위에 정리된 질문 이외에도 궁금한 많은 것을 물었다. 나의 도발적인 질문이나 곤란한 질문에도 그는 항상 본질에 접근하려는 학자의 자세로 진지하게 답변을 해 줬다. 부인이 낭만주의자라고 놀리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겠다. 그는 항상 자신의 정답을 준비하고, 그 정답의 충실하게 살려고 애쓰는 예의바르고 겸손한 학인(學人)이다. 갈수록 재미와 실리만 추구하는 우리 시대에 우직한 변호사이다. 피레네 산맥 밖의 피카소가 산맥을 넘어 미술의 본령인 파리를 점령한 것처럼 항상 변방에서 본질을 궁구하는 최승재가 우리 중심부를 일깨우는 큰 학자가 될 것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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