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람이 제법 차다. 한강변은 여러 날째 얼어 있다. 매서운 바람을 맞는 때면, 어김없이 해가 바뀌어 있고 지난 기억을 정리하면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갈 즈음이다.
그런데 옛 기억을 정리하기가 참 쉽지 않다. 굳이 잊으려고 지워 버리려고 하면 지난 해 것들 말고도 여러 해 전의 기억들이 숱하게 떠오른다. 좋든 싫든, 기쁘든 아프든 그런 기억들은 모두 “추억(追憶)”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을 늘 맴돌아 왔던가.
오래전 옛 성인(聖人)들은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희(기쁨)”, “노(노여움)”, “애(슬픔)”, “구(두려움)”, “애(사랑)”, “오(미움)”, “욕(욕심)”이라고 했던가. 그런데 조금 부족하다. 이런 범위에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감정 한편에 늘 남아 있는 것은 바로 “그리움”이다. 그것은 사람의 흔한 감정이면서도 쉽게 극복하거나 어쩌지 못하는 것일 게다. 특히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이라면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 아련한 아픔은 어찌할 것인가.
추억追憶
조병화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涇?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기 시(노래) 한 편이 있다. 느릿한 곡조에 메조 소프라노가 감흥을 듬뿍 담아 읊조리는 동안, 쉽게 써진 시어는 낱낱이 가슴에 박힌다. 여름, 가을이 지나간 겨울의 빈 바다에 “하루”, “이틀”, “사흘”을 세고 있는 화자(話者)의 노래는 “그리움”과 같은 말이다. 겨울 바람을 맞으며 바다 기슭을 걸었던 노래꾼(詩人)은 그 때 무슨 기억을 떠올렸을지...
“시간이 약이다”, “지나면 잊혀진다”라는 말들이 얼마나 헛되고 거짓되었던가. 실연의 가슴앓이를 해 온 시인에게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겠는가.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고 다시금 이 겨울과 함께 남았다.
이젠 시인에게 ‘그리움’은 ‘사모(慕)’와 ‘애련(戀)’을 넘어선 것일 게다. 한때는 지독히도 잊어 버리고 싶고 지워 버리고 싶은 기억들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추억(追憶)”이라는 이름으로 가슴에 깊이 박혀 있으니 말이다.
새해에는 누구나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한다. 새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야한다는 말들은 많이 들어온 바다. 하지만 돌이켜 옛 기억을 정리하는 법에는 다들 미숙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네 삶 각자의 추억이 켜켜이 쌓여 있을 테니 정형화된 방법이 있을 리는 없을 터다.
매해 사계절은 지나고 삶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스쳐 보내곤 한다. 하지만, 지난 시간들, 지난 기억들은 점차 추억으로 남게 되고 언제나처럼 마음 속 그리운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그리움 또는 추억은 기쁨 아닌 묘하게 슬픈 감정일지 모른다. 행복을 갈망하는 삶 속에서도 이런 추억들은 가슴 깊이 계속 흐르고 있다. 그렇기에 종종 삶의 행복이란 이런 추억들과 함께 하면서 “비애(?哀)의 강물 속 깊이 가라앉아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사금(砂金) 같은 것(다자이 오사무)”이 아닐까.
유재원 변호사
사법시험 제45회(연수원 35기)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입법조사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