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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중동의 파리였던 레바논의 베이루트
베이루트는 두바이가 중동의 허브로 등극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중동의 파리라 불릴 만큼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2012년 5월 레바논을 처음 방문할 당시의 레바논의 정세는 안정적이지 못했고, 테러 및 유혈분쟁의 기미가 있었다. 시리아 사태, 헤즈볼라와 이스라엘의 긴장, 수니파와 시아파의 대립각 등 여러 가지 상황이 안전하다는 느낌보다는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하늘에서 바라보는 베이루트 전경은 아름다웠다. 당시 “언제쯤이면 자연이 준 축복대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라는 단상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다행히도 최근의 레바논 상황은 많이 호전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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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레바논 첫 출장 시 찍은 베이루트 시내


레바논은 시장 규모에 비해 재미있는 일이 많은 곳이다. 국제 중재판정의 레바논 내에서의 집행, 본사의 지점을 법인의 지점으로 변경, 외국판결의 집행과 관련하여 해외에 소재하는 자산에 대한 확인 및 강제집행 가능성 검토, 레바논에 근거지를 두고 아프리카 지역에서 사업하는 레바논 출신 거부들과의 협상 등 업무를 위해 베이루트에 수차례 방문했고, 현지 변호사를 비롯한 친구들도 제법 사귀게 된 것 같다. 

레바논은 1943년 11월 독립한 이래, 정치적 우위의 그리스도교 세력과 이슬람교 세력 사이에 정권 쟁탈을 위한 갈등과 대립이 계속되었다. 즉 친서구적이고 보수적인 그리스도교(마론 카톨릭, Maronite)와 급진적 이슬람교도 사이의 불균형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다 1958년 그리스도교도이자 친서방 정책을 표방했던 샤문 대통령의 헌법개정을 통한 재선 시도에 이슬람 세력이 국민통일전선을 결성하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미군의 개입으로 1차 내전은 간신히 무마되었지만 여전히 불씨를 남기고 있었다. 

1970년 9월 요르단에서 추방당한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레바논 남부 지역에 난민촌을 건설하여 이스라엘과 무장투쟁을 시작하고, 이어 1972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베이루트에 본부를 설치하면서 또 다시 내전에 돌입하였다. 1975년에는 이슬람 게릴라들이 레바논 정부와 그리스도교 세력을 상대로 국지전을 전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시리아가 사태 수습을 핑계로 정규군을 투입하기도 하였다. 이 때부터 1986년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레바논 전역은 지긋지긋한 내전에 휩싸여 충돌이 끊이지 않았고 수십만 명이 죽어 나갔다. 이스라엘도 1978년부터 수차에 걸쳐 레바논을 침공해, 이후 레바논 내전은 이슬람 게릴라 단체들과 이스라엘 사이의 분쟁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정국이 다소 안정된 뒤에도, 이슬람 무장단체인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사이의 무장투쟁은 2000년 5월 이스라엘이 남부 레바논에서 철수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현재까지도 소규모 국지전의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1989년 체결된 타이프(Taif) 협약에 기초하여 레바논은 1990년 헌법을 개정하였다. 그 결과 기독교계 대통령의 권한이 약화된 반면, 무슬림계인 총리(수니파) 및 국회의장(시아파)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이로써 사실상 대통령, 총리, 국회의장이 권력을 균점하는 트로이카(Troika) 체제로 정국이 운영되고 있다. 또한, 의회는 기독교와 무슬림이 의석을 동등하게 배분한다. 이로써 기독교와 무슬림 간의 정치권력 구조가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지만 레바논의 불안정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출장 기간 중 시리아 아사드 정권에 반대하던 수니파 종교지도자가 시리아 국경 근처에서 피살된 사건으로 인해 시아파와 수니파 간에 총격전이 있었다. 이 유혈사태는 2008년 레바논 내전 이후 베이루트에서 발생한 최대 규모로, 부득이하게 묵고 있던 호텔을 옮겨야 했던 해프닝도 있었다. 최근에는 시리아 내전으로 인한 난민의 유입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이다. 

또 아슈라[Ashura, 예언자 모하메드의 손자이자 시아파 3대 이맘인 후세인 이븐 알리가 카르발라 전투(680)에서 수니파에 전사(순교)한 것을 기리는 날] 기간이 출장 일정과 겹친 덕에 인상 깊은 상황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일부 시아파 국가들에서처럼 스스로 채찍질을 하는 일은 없지만, 후세인의 순교를 애도하는 시끄러운 노래 소리가 온 시내를 뒤덮고 있음에도 기독교인 및 수니파 무슬림들이 이런 상황을 별 불편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자세한 내막을 들어 보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레바논의 종교 구성은 이슬람 시아파(약 30%), 이슬람 수니파(약 30%), 마론 기독교(약 40%)로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종파가 함께 모인 것이고, 정치적으로도 오랜 내전으로 서로에 대한 증오심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지만, 불편하고 복잡한 레바논의 현실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국민들은 ‘외관상 관용’이라는 형태로 상대방을 수용하는 행동양식을 몸에 체득하고 있었다. 당연히, 종교를 언급하는 것은 금기시된다고 택시 기사가 조언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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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자의 기원인 페니키아 문자가 만들어진 비블로스 


베이루트 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25Km를 올라가면 아름다운 전경의 지중해를 바라보는 비블로스(Byblos) 유적을 볼 수 있다. 출장 중 짬을 내서 다녀왔다. 고대 페니키아 문명의 발상지로서 3,000년 전에 이미 페니키아 문자를 만들고, 해상무역으로 찬란한 문명을 형성했던 조상들이다. 레바논 기독교인들은 스스로를 아랍의 후예가 아닌 페니키아의 후예라고 생각하면서 레바논 사람들은 페니키아인의 혈통을 물려받아 모든 분야에서 뛰어나다고 자부한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고대 문명은 분명 하나의 경제문화 공동체였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옳았다. 레바논에 있는 트리폴리와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의 연관성, 튀니지의 시돈 공주가 레바논 출신이라는 사실, 페니키아의 가장 번성했던 식민지였던 카르타고 출신의 하니발 장군 등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의 시작이 레바논이었다는 사실이 레바논이라는 나라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지금은 종교분쟁, 헤즈볼라, 이스라엘 및 시리아 정부와의 불편한 관계, 대통령이 공석인 현상, 빈약한 사회간접시설, 경제적 침체 등 부정적인 면이 많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지만, 베이루트는 여전히 중동의 가장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도시로 다양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척박한 여타 중동 국가와는 달리 비옥한 토지에서 공급되는 계절 농산물과 과일, 지중해에서 공급되는 신선한 해산물 등 풍부한 식자재를 바탕으로 음식문화가 매우 발달했다. 레바논 음식을 제외하고 중동 음식을 논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방문 기간 중 “이 맛있는 것들을 어떻게 다 먹을 수 있나?” 하고 식사를 할 때마다 즐거운 탄식을 했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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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의 OBEID 포펌 owner의 아들이자 파트너인 친구 Ziad와 요르단 법무담당자 Lina 


레바논 변호사 친구 덕분에 베이루트의 청담동이라 하는 Gemmayseh 지역을 방문하여 하룻밤 동안 여러 카페와 식당을 돌아다니며 ‘아락(중동식 소주, 대추야자를 발효시킨 후, 그것을 통상 3회 증류시켜 얻은 원액에 물을 타서 마시는 방식. 이 원액에 물을 타면 술이 우윳빛으로 변함)’을 즐기는 레바논 사람들과 거나하게 술을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 해외에서 활동하다 가족을 보기 위해 들어왔다고 했다. 레바논 거주 중인 인구는 약 4백만 명인 데 반해 해외 거주 레바논인은 천백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전세계에 퍼져 있는 민족이다. 특히 브라질에는 7백만 명이나 살고 있다. 

레바논은 프랑스 법제의 영향이 강한 나라로 여타 중동국가와는 달리 이슬람법의 영향이 매우 약하다. 중동의 법제 중 가장 서구화되었다고 본다. 특히 레바논 변호사들은 대부분 아랍어, 영어, 불어를 구사하기 때문에, 전세계 어디든 진출이 매우 쉽다. 중동 및 북아프리카 거의 모든 지역에 진출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함께 일을 할 기회가 가장 많은 아랍 변호사 집단이다. 

매우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지만, 국가의 불안 및 안정되지 못한 정체는 국가 브랜드 및 국민의 자존감을 깎아내리고 있다. 아쉬운 일이지만, 레바논 사람은 말이 많고, 시끄러우며, 자기 주장을 강하게 하지만, 신뢰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지 않다. 그 때문인지, 중동지역에서 득세하는 변호사들은 레바논 출신보다는 역량은 조금 떨어지지만 덜 나대고 종교적 색채를 바탕으로 한 신뢰를 주는 요르단 출신이 더 많다. 

한국의 남북, 동서, 영호남의 갈등은 해결하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레바논의 복잡한 역사와 종교적 차이에 기반한 갈등은 피를 부르는 갈등으로 해결이 거의 불가능하다. 레바논 사람들은 한국인과 여러 가지 면에서 닮았지만, 현재 한국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계 무대에서 플레이어로 활동하고 있고, 레바논은 갈등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레바논 친구의 바람대로 레바논이 대화합을 이루어낼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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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15. 
김현종 변호사
사법시험 제47회(연수원 37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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