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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역사의 라이벌 이순신과 히데요시, 진정한 영웅은 누구인가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희극으로 또 한번은 비극으로. 2014년 4월 16일 충무공 탄신일을 얼마 앞두고 진도 앞바다 맹골수도에서 세월호가 침몰, 단원고 학생들을 비롯한 억울한 생명들이 슬프게 죽어 갔고, 그들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1597년 8월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궤멸되자 선조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한다. 이순신은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질대로 떨어진 수군들과 단지 13척의 판옥선만으로 진도 앞바다 울돌목(소리가 돌아가는 길목)을 전투 장소로 정한다. 이순신은 150척이 넘는 전선을 동원한 토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루시마 미치후사 등이 지휘하는 일본 수군과의 긴박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승리는 그의 고백대로 실로 천행이었다. 명량의 승리를 통해 이순신은 그를 따르던 숱한 백성들의 생명을 보존함과 아울러 수륙병진을 통해 달성하려던 히데요시의 거친 야욕을 1592년 한산도에 이어 또다시 꺾어 넘겼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그는 우리 한국인이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침략의 원흉이자, 일본인에게는 메이지 유신 이후 더욱 영웅으로 현창 되는 인물이다. 15세기 후반 아시카가 막부 말기 일본에서는 쇼군의 계승 문제로 야기된 오닌의 난 이후 각지에서 봉건 영주가 등장하여 패권을 다투는 100년이 넘는 전국시대가 전개된다. 카이의 호랑이 다케다 신겐, 에치고의 용 우에스기 겐신, 호조 소운 등 당대의 전국 다이묘들을 모두 제압하고 가장 먼저 교토로 입성한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통일될 듯이 보였던 일본 전국은 혼노지(本能寺)의 변(오다 노부나가가 가신 아케치 미츠히데의 배신으로 교토 혼노지에서 죽은 사건)으로 격랑에 휩싸이게 된다. 이 때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를 차지하고자 히데요시를 비롯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바타 가쓰이에 등이 각축을 벌인다. 당시 모리가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히데요시는 전략적으로 모리가와 휴전하고 누구보다도 먼저 교토로 귀환하여 야마자키 전투에서 아케치 미츠히데군을 물리치고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 지위를 확립한다. 1590년 호죠가를 제압하고 일본 전국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마침내 큐슈 나고야(名護屋)성에 30만 대군을 소집하고 정명가도의 기치 아래 조선 침략을 단행한다. 

한편 당시 조선 조정은 조선과의 무역을 중시한 쓰시마 도주의 요청으로 임진란 2년 전에 황윤길을 정사, 김성일을 부사로 하는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한다. 교토에서 히데요시를 만나고 온 이들은 선조 앞에서 히데요시에 대해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하게 되고, 당시 정국을 주도하고 있던 동인들은 황윤길의 보고를 배척하고 김성일의 보고를 채택한다. 위와 같이 국론이 분열된 근저에는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 이른바 기축옥사가 자리하고 있다. 정철이 위관(특별검사)이 되어 진행된 이 사건으로 1000명이 넘는 숱한 선비들이 죽음을 당하였고, 율곡 이이에 의해 간신히 균형을 이루었던 동인과 서인은 정적이 되어 서로 상대의 생명을 요구하게 됨으로써 관용은 사라졌다. 그리고 개국 후 200년 동안 커다란 외침이 없었던 조선은 국방을 소홀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도 정확히 감지하지 못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7년 전쟁, 그로 인해 민초들이 처한 비극적 상황에서 조선에는 준비된 영웅 이순신이 있었다. 임진란이 발발하고 신립이 이끌던 기마부대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 제1군에 패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선조는 함께 도성을 지키자는 백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빗속에 한양성을 버리고 임진강을 건너 평양성으로 향한다. 결과적으로 선조는 비겁한 몽진으로 생명을 보전한 사실과 임진란 발발 1년 2개월 전 당시 정읍현감으로 재직하고 있던 이순신을 사헌부와 사간원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6품계를 상차하여 전라좌수사로 임명함으로써 히데요시에게 결정적 패배를 안겨주게 되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이순신은 자신의 관할 하에 있던 5관 5포의 군비를 정비하고 새로이 거북선을 건조하였으며, 조선 수군의 주력 전함인 판옥선을 정비·증선하고 병사들에게는 활쏘기를 훈련시키고 학익진 등의 전법을 꾸준히 반복 숙지시킴으로써 최강의 정병을 양성한다. 당초 히데요시는 수륙병진을 통한 속전속결로 조선을 제압하고, 조선군을 앞세워 명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러한 히데요시의 생각은 전쟁 초 157,000명의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조선을 공격하여 부산포에 상륙한지 불과 20여일 만에 한양성을 점령함으로써 현실화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조선의 바다에는 이순신이 이끄는 정예 조선 수군이 버티고 있었다.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을 이어가자, 히데요시는 육전에 투입했던 장수들을 해전으로 배치하여 이순신과의 일전을 명령한다.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일본 수군을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궤멸시킴으로써 마침내 수륙병진을 도모했던 히데요시의 야욕은 꺾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한산도 패전 이후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에게 이순신과의 해전금지령을 내리고 거제도와 부산포 등의 해변가에 왜성을 축조하여 방어전을 준비하도록 명령한다. 

만일 임진란 초기에 이순신이 수군을 정비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조선 수군이 패전함으로써 서남해의 제해권을 일본 수군에 넘겨주었다면 히데요시의 야욕은 그의 의도대로 실현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는 직접 조선 땅에 입성하여 전쟁을 지휘할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조선에 건너올 상황이 되었다면 조선의 명운은 풍전등화였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7년 전쟁의 혼돈 속에 준비된 영웅 이순신이 있었기에 그의 야욕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순신의 위대함은 단지 해전에서 연전연승한 사실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전쟁으로 갈 곳을 잃은 조선 백성들, 심지어 국왕마저 외면한 조선 백성들을 위해 한산도에 통제영을 건설하여 자기를 믿고 찾아온 백성들의 생존과 일상을 책임졌다는 사실이다. 이를 위해 이순신은 현명한 부하들의 조력을 받아 둔전 개발, 소금 전매, 물고기와 양식의 교환 등의 정책을 통해 재정을 확보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후 그는 고하도와 고금도에 새로이 통제영을 설치하고 해로통행첩까지 발부하여 자기를 믿고 따르는 백성들과 수군들의 안정된 삶을 마련해주었다. 이순신은 7년 전쟁 전 기간 동안 단순한 해군지휘관이 아니라 준비된 최고의 정치지도자였다. 인적, 물적 자원의 효율적 활용, 적재적소에의 인재 등용과 배치, 정확한 정보에 입각한 최선의 전략 수립과 피해를 최소화하는 당파전술 등 이순신의 위대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7년 전쟁의 시간은 이순신에게는 고독하고 힘겨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어 백의종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을 보러 오던 어머니 초계 변씨는 꿈에라도 보고싶은 아들을 끝내 보지 못하고 배안에서 죽음을 맞는다. 이순신은 모친의 죽음을 접하고 가슴을 치며 오열한다. 죄인의 몸으로 어머니의 장례마저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권율 장군의 휘하로 내려간다.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기울어가던 조선의 명운을 바로 세우자마자 그가 가장 사랑했던 셋째 아들 면의 죽음을 알게 된다. 이순신은 통곡한다. 그는 전란 중 남긴 일기에 그 날의 슬픔을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순리일진데 어찌 하늘이 이리 무심한가. 나도 너를 따라 죽고 싶으나 네 어미와 형들이 남아 있으니 죽을 수도 없구나’라고. 이순신은 연전연승한 해군제독으로 자신의 위상을 자랑하거나 뽐내지 않았다. 비극적 전쟁으로 인해 죽어간 가족과 조선 민초들로 인해 슬픔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결전의 순간에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결연한 의지로 전투를 지휘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영웅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히데요시는 심유경과 고니시 간에 진행된 강화 협상이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알고 정유년 재침을 명하지만 명량해전에서 패하며 그 야욕이 꺽였다. 그리고 마침내 1598년 히데요시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다. 그는 요도기미에게서 뒤늦게 얻은 아들 토요토미 히데요리로 하여금 자신의 권력을 이어가게 하고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 등 다섯 명의 다이로를 불러 외아들 히데요리에의 충성을 다짐하는 피의 맹세를 하게 한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잘못된 야욕으로 인해 죽어간 부하들과 그로 인해 처참한 생활을 하게 되는 민중들의 슬픔은 안중에 없었다. 오직 권력재창출을 통한 자기 존재의 영속만이 그가 추구한 전부였다. 그의 희망은 비참하게 좌절된다. 울지 않는 새는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던 인내의 화신, 너구리 이에야스에 의해 그의 일족은 멸문의 화를 당하게 되니 말이다. 

이순신은 어떠하였는가? 히데요시의 죽음(1598년 8월 18일) 이후 일본군 수뇌부는 비밀리에 조선반도에서의 철군을 계획한다. 순천 왜교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도 철군을 준비한다. 그러나 고니시 부대가 부산으로 향하는 관음포 앞바다는 이순신이 지키고 있었다. 이순신도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소식은 들었다. 고니시가 명나라 제독 유정과 진린에게 뇌물을 주어 퇴로를 확보하려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조선반도를 유린하고 숱한 생명을 앗아간 일본군을 편안한 귀국길에 오르게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7년 동안 계속된 전쟁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민초들의 원혼을 달래고, 자신을 믿고 따르면서 귀한 목숨을 바다에 던진 충직한 부하들을 위해 마지막 전투를 시작한다. 고니시를 구원하기 위해 시마즈 요시히로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이 500척의 배를 동원하여 노량에 이른다. 만일 이순신이 적의 퇴로를 열어 주고 마지막 전투를 하지 않았다면 그는 살아 남아서 7년 전쟁 최고의 공신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마지막 전투인 노량 바다에 자신의 피를 쏟았다. 그리고 드디어 전쟁은 길었던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자신의 야욕을 위해 조선침략을 단행하였고, 죽기 직전에는 아들 히데요리를 통해 권력을 이어가기 위해 부하들에게 무릎까지 꿇고 히데요리에의 충성을 부탁한 히데요시.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한 군웅일지언정 진정한 영웅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독과 번민 속에서, 그리고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면서도 생의 마지막까지 자신을 믿고 따르던 부하들과 민초들의 생명과 행복을 지켜준 이순신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일 것이다. 고금도에서 아산까지 그의 관이 운구되는 동안 백성들이 모두 나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통곡하였고, 심지어는 그의 숭고한 죽음을 기리기 위해 많은 선비들이 부모의 죽음처럼 초막을 짓고 3년상을 지내기도 했다. 

그가 가고 난 이후 세월은 흐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깊은 바다에 가라앉아버렸다. 큰사람 이순신, 그가 몹시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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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훈 변호사
사법시험 제43회(연수원 33기)
법무법인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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