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에서 살아가는 짐승들 중에 가장 날렵하고 신사다운 모습을 지닌 것으로 단연코 '사슴'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일단 몸이 날렵한데다가 뿔이 잘 생겼고, 또 다리가 가늘어 경쾌한 느낌을 주는 것은 단연코 사슴을 능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동양에서는 사슴에 날개를 붙여 천사를 싣고 다니는 길잡이라 여겼다.
이에 반하여 서양에서는 말에 날개를 붙여 천사를 싣고 다니는 것으로 상상하였다. 그러나 서양에서 날개 달린 말을 신성하게 여기는 일과 동양에서 날개 달린 사슴을 신성시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서양에서의 말은 힘이 세고 튼튼하고 잘 달리는 능력 면으로 보면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고 하겠지만, 동양에서의 사슴은 말보다 지구력은 다소 떨어질 수 있겠으나 경쾌하고 기품이 넘치는 것으로 본다면 말을 능가할 수 있다고 본다.
동양에서는 왜 날개 달린 사슴을 천사를 나르는 매개체로 삼았을까? 만물 중 가장 귀하다는 사람은 사슴처럼 뛰지도 못하고 새들처럼 날지도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사실을 부러워하여 날개 달린 사슴을 상상하며 사람 자신들이 지니는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희망을 표상했던 것이다. 즉, 날개는 무한한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게 하는 것이며, 날렵하고도 경쾌한 몸집에 멋진 뿔을 지닌 사슴은 무한히 넓은 대지를 마음대로 뛰어 다닐 수 있는 참으로 부러운 존재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도 어쩌면 저 날개 달린 사슴처럼 전후좌우와 상하를 마음껏 뛰고 나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무한한 뜻을 담았다.
그런데 왜 인간들은 ‘시비’와 ‘이해’라는 서로가 만든 보이지 않는 덫 장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만이 지닌 자유를 왜 만끽할 수 없는 것인가? 자유는 참으로 소중한 인간의 가치이다. 그러나 자칫 자신의 자유를 너무나 확대하다 보면 나 아닌 남이 부자유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같은 부자유는 엄연히 공동사회를 혼란에 빠트릴 수 있다.
여기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날개 달린 사슴(鹿)에 날개 달린 새(鳥)를 합성시켜 만든 '薦'(짐승이름 천)이라는 동물이었다. '천'이라는 이 동물은 욕심 없는 초식동물로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거창한 뿔이 아닌 외뿔을 지녔는데, 이 세상의 모든 부자유를 대하면 그 때마다 이 외뿔로 청산해 버린다는 것이다. 즉, 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옳고 그른 시비의 판단은 이 신성한 사슴의 외뿔이 간단히 깨끗하게 물리쳐 버린다는 것이다. 또 물은 공평의 상징이다. 그래서 옛날 송사 마당에는 반드시 이 '천'을 배경으로 모시고 맑은 물을 재판관의 앞에 떠다 놓고 진행하였다.
원고는 원고대로 자신의 입장을 풀어내고 피고인은 피고인대로 자신의 입장을 재판장에게 잘 말씀드리다 보면 재판장은 좌우에 있는 이들의 말을 잘 귀담아 듣고 난 뒤에 시비를 가리는 형사문제는 '천'으로 하여금 처결하게 하고, 이해를 다투는 민사의 문제는 공평을 나타내는 물에 맡겨 물이 흐르는 쪽으로 손을 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법'이란 본디 '薦'에 '水'와 '去'를 합성하여 '법'이라는 뜻을 나타냈었는데 지금은 단지 '水'와 '去'를 합쳐 '法'이라 써서 물이 흐르는 대로 판단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인간의 관계는 시비와 이해의 두 관계로 얽혀 있다. 그러나 이런 관계는 바람직한 관계가 아니다. 언제나 가장 바람직한 관계는 서로 좋은 관계, 즉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관계인 것이다. 겉으로는 옳고 그름을 가지고 다투는 것 같으나 속으로는 이로움과 해로움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더욱 복잡해질수록 이해에 관한 싸움이 더욱 치열하다.
그러나 시비와 이해도 상대를 일단 배려할 줄 아는 마음만 가지게 된다면 이 세상의 시비이해 싸움은 점점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형사문제의 시비, 민사소송의 이해는 자유와 평등을 찾아주는 법원이라는 매개체가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 먼저 자리이타 정신으로 살아가자는 조용한 발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황안웅 한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