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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묘(破墓)〉의 한국사회 파묘(把描)

1. 불임(不妊) 사회

 한국은 불임사회다. 생존과 번식은 ‘자연’의 본능에서 비롯된다. 이 본능(‘힘’)이 ‘무언가’에 압도당해 거세되고 있다. <파묘> 속 자손들 역시 시달린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부동산’업을 해 큰 ‘돈’을 축적한, 생래적 ‘부자’들이나, LA 대저택엔 음산한 기운과 절망감이 배어난다. 대대로 ‘험한 것’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기가 위험하다. ‘미국’ 의사는 원인을 찾지 못한다. 의학적으로 정상이란다. 아기는 생을 이어갈 수 있을까? 이 ‘유전’되는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용한 무당 화림이 초청받는다. ‘미국’행 ‘일본’기(機) 승무원이 ‘일본’어로 응대하자 화림은 ‘한국’인이라 답한다. 아기의 ‘증상’을 본 화림은 ‘묫바람’을 지목한다. 조상 ‘묫자리’에 문제가 있다는 것. 마침내 화림과 지관과 장의사는 그 ‘묘’로 향한다. <파묘>의 위 기호들은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요소들을 지시하는 복선이다. <파묘>가 이 불임사회를 파헤칠 판이다.


2. 심연 마주하기

 고통(증상)의 원인은 ‘묘’에 봉인돼 있다. 봉분은 현생/죽음, 의식/무의식 사이에 걸쳐 있다. ‘파묘’란 그 너머 무의식 캐내기를 말한다. 의식으로 무의식을 포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무당, 지관, 장의사가 나서야 하는 이유이다. 이들이 다다른 ‘묫자리’는 듣도 보도 못한 음택(陰宅)이다. 잘못 손대면, 지관부터 일꾼까지 줄초상 날 곳. 여우들이 나타나 돌아가라 경고한다. 이 ‘험한 곳’을 파헤쳐 심연과 마주할 용기와 능력이 있는가? 

 정신분석학은 환자의 언어를 분석해 증상의 원인(‘힘’)을 찾는다. 이를 위해 심연으로 침잠해야 한다. ‘험한 것’을 향해 파헤쳐 들어가야 한다. 숫자만 새겨진, 이름없는 ‘묘’를 깨뜨려야 한다. 다만,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역시 당신을 들여다본다(니체).


3. ‘험한 것’의 능력(‘힘’) 대 인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파묘>의 ‘묫바람’이 바로 ‘힘’이라는 점이다. 한 가문을 몰락시킬 살아있는 ‘힘’. 그것이 한 가문만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데에 극 중 반전이 있다. 그것이 ‘힘’인 이상, 이를 촉발하는 다른 인과적 ‘힘’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 다른 ‘힘’의 발견, 여기에 열쇠가 있다.

 그 ‘힘’을 받는 존재는 물론 인간(극 중 자손들)이다. 그 ‘힘’은 자연과 사회로부터 온다. 즉, 인간은 자연과 사회의 각종 ‘힘’들에 얽힌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회적 동물’이 의미하는 바이다. 어떤 ‘힘’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자기이해가 달라질 수 있다. 근대 이전의 인간은 종교와 도덕의 ‘힘’에 심하게 규정되었다. 계몽의 이성은 그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외쳤으나, 근대 이후의 인간 역시 강한 ‘힘’들에 규정되고 있음이 밝혀진다. 예를 들어, 도킨스에 의하면 인간은 ‘유전자가 자기복제를 위해 만들어 놓은 로봇’에 불과하다. ‘자연’의 ‘힘’의 극단적 강조이다. 

 정신분석학 역시 증상(히스테리나 강박)을 야기하는 ‘힘’의 작용과 에너지의 흐름을 보고자 한다. 무의식의 원초적 ‘힘’이 인간 정신에 미치는 과정을 파고든다. 개인의 무의식 탐구가 가능하다면, 개인들의 집합체인 사회(‘집합의식’)의 증상을 촉발하는 ‘힘’을 찾는 것 역시 가능하다. 본격적으로 <파묘>의 정신분석학이 개시되어야 할 시점이다.


4. ‘묫자리’에 쇄도하는 ‘힘’들의 연쇄반응

 ‘묘’의 알레고리는 이 땅, 한반도이다. ‘묫바람’은 이 땅을 뒤흔든 역사변동의 ‘힘’에서 촉발되었다. 거두절미하고, 16세기 종교개혁, 17세기 과학혁명, 18세기 근대철학의 정립을 통해 분출된 새로운 ‘지식- 힘’들이 연쇄 반응하며 서구사회를 변동시켰다. 시민· 산업혁명으로 구체제는 붕괴하고, 국민국가가 탄생했다.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로 나아갔다. 비서구권을 노예(식민지)화했고, ‘근대(국민국가)’를 강제 이식했다. 이를 모방해 일본은 서구화의 길로 나아갔고, 조선은 식민지가 되었다. 

 한반도는 이러한 ‘힘’의 변동경로에 놓여 있었다. 그 결과 ‘문명개화’란 이름으로 강요된 상흔이 온몸에 새겨졌다. 동강 난 이 땅에, ‘망국, 경제 수탈, 위안부, 강제징용, 관동대학살, 분단, 한국전쟁, 38선, 군사독재, 자이니치’ 등 참담한 비애와 증상들이 흩뿌려져 있다. 정신분석학이야말로, 당대의 물리· 생리· 생물의 과학적 성과에 의존했고, 이들 과학이 규명해 내는 ‘힘’에 주목하고자 했다. 이 땅에 몰아치는 ‘힘’과 ‘증상’의 과정을 살피는 것은 정신분석학의 본령에서 그리 멀지 않으리라.


5. ‘묘’에 응축된 ‘힘’, 유사종교의 ‘힘’에 포획된 자손들

 ‘묘’의 주인은 중추원 부의장을 지낸 일제 고관이다. 제국의 ‘힘’이 들러붙어 있을 터, 면면히 증손까지 괴롭힌다. 극 중 손자 입에서 ‘대동아공영권’ 방언이 터져 나오고, 그 ‘힘’의 기원이 선명히 나타난다. 식민지배권력, ‘친일 - 지주’ 결합의 정치체제 원형을 만든 초대 대통령(정병준, 『1945년 해방 직후사』), 일본 군관학교 출신의 절대권력 ‘다카기 마사오’, 그가 배양한 독버섯 ‘신군부’와 그 후예들의 웅변 · 훈시들은 그 방언과 맥놀이 한다. 거대한 정치적 ‘힘’의 형성과 변주! 

 일제도 결국 인간 집합체이므로, 그 의식을 움직일 다른 ‘에너지’가 필요하다. 일제에 국가야말로 신(神)이고, 중심에 천황이 있다. 세계만방이 천황 지배하에 있다는 팔굉일우(八紘一宇) 이념은 천황제 파시즘의 핵이다. 이에 목숨 바친 군신(軍神)들이 야스쿠니신사에 산다. 이 황국의 만신전은 제국의 무의식이고, 제국의 욕망(id) 넘치는 활화산이다. 최근 ‘자위대’ 고위장교들이 집단으로 신사 참배를 하였고, 한국 대통령실은 3 · 1절 기념식 표어의 두문자를 ‘자위대’로 나타냈다. 그럴 리 없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에서 ‘실수는 은폐된 무의식적 동기가 드러나는 행위’이다.


6. 움직이는 쇠말뚝

 이제 ‘묫바람’을 일으키는 ‘험한 것’의 정체에 근접했다. 쇠말뚝은 <파묘>의 중심 소재다. 이 영화의 미덕이라면, 쇠말뚝의 단단한 물성이 진정한 ‘힘’의 작용을 눈앞에서 계속 치우고 있음을 지적한 점일 듯하다. 쇠말뚝은 살아 움직인다. 극 중 진정한 쇠말뚝은 ‘묫자리’에 첩장(疊葬)해 둔 사무라이 요괴였다. 이는 야스쿠니신사의 식민지 출장소이자, 은폐된 무의식을 의미한다. 

 쇠말뚝의 본산, 일본 군국주의는 ‘힘’이 거세다. 태평양전쟁 기준, 100년도 안된 군국주의가 1,000년이 넘은 일본 불교를 단박에 잠식해 살육과 전쟁을 찬미하는 동양판 ‘십자군 이데올로기’로 변질시킨 바 있다(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 『불교 파시즘』). 미국은 그 상징, 천황제를 존속시켰고 이어 대아시아 전략을 위해 일본의 재무장(소위 ‘보통국가화’)을 촉진시키는 중이다. 탄력받은 일본 신사는 용틀임 치며 신군국주의를 소환한다(강동완, 『일본 신군국주의』). 이로써 ‘미국’ 의사가 증상의 원인에 대해 결코 답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게 된다. 

 우리는 <파묘> 밖에서 움직이는 쇠말뚝을 상상해 볼 수도 있다. 거침없이 한반도를 육박해 오는 신군국주의 첨병들에게 물길과 하늘길을 열어젖히는 그 쇠말뚝들 말이다! 


7. 파묘(破墓) 현상의 파묘(把描)

 <파묘>는 걸판진 ‘대살굿’이고, 관객은 굿판의 구경꾼들일 뿐이다. <파묘>의 빛나는 순간은, 함께 일했던 일꾼의 동티를 외면하지 못하고 주인공들이 심연으로 향하는 바로 그 시점이다. ‘대중의 욕망’이 동료를 향한 책임과 의지로 바뀌는 그 순간! 유감스럽게도, 이 굿판은 그 이상의 길을 열어주지는 못한다.

 <파묘>의 텍스트가 생성되는 지점을 상상해 본다. 해방 후 수립된 정치체제는 ‘일제와 친일’의 문제를 대중 의식의 수면 아래로 끌어내렸으나, 그 기반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친일청산을 모면하기 위한 절박한 본능의 힘(id)은 한 마음으로 극렬한 ‘반공주의’ 이념의 ‘힘’을 이용하고자 했다. 이러한 반공사회(‘집합의식’)의 초자아(super-ego)로 기능했던 대표기관 중 하나가 검찰이다. ‘반공’의 기치 아래 국가폭력의 일익을 맡았고, 대중의 무의식에 공포를 심었다. 이 시기 대중은 ‘비천한 자’(니체)의 자아로 전락했고, 시인 김수영은 “나는 아직도 글을 쓸 때면 무슨 38선 같은 선이 눈앞을 알찐거린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억압된 것들은 반복해 회귀하기 마련이다. <파묘>의 정신분석학은, 이 ‘반공주의’ 아래 첩장 된 ‘친일’과 ‘군국주의’의 이념을 가리킨다. 

 이 초자아들은 마침내 ‘적폐수사’라는 ‘파묘’ 기술로 권력의 정점에 섰다. 그러나 목도하듯, 현실 정치에는 무능하다. 경제, 외교, 안보, 민주주의 모두 부실이다. 무능과 비위로 정치적 위기를 맞자, 최근 ‘의대증원’의 기치 아래 필벌의 이분법을 소리 높여 외친다. 기탄없이 욕망(id)을 드러내는 의사들의 거만한 자아(ego)를 향해 이 초자아의 대변인들이 돌격하고, 대중은 복수심에 열광한다. 이 난장판 속 필수의료, 공공의료 정책 논의는 실종되었다. 이들은 어쩌면 이 땅에 결코 들여 놓치 말아야 할 더 ‘험한 것들’을 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극락도 살인사건〉).

 무의식의 ‘힘’을 언어, 이데올로기, 구조의 ‘힘’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그 ‘힘’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다만, 그 ‘힘’의 종속변수로만 머물지 말라는 것이 니체의 ‘의지’나 프로이트 정신분석이나 실존철학의 교훈일 것이다. 이 땅에 ‘억압된 것들이 반복 회귀’하도록 만드는 주술을 종식시키고, 깊고 풍요로운 역사 · 문화적 본능으로서의 집단무의식(융)이 잘 자리 잡기를 꿈꾸어 본다. 이를 위해 우리를 규정하는 자연과 사회의 ‘힘’, 이 땅에 육박해 오는 지구정치의 ‘힘’을 잘 파악하고 대응할 방안을 마련해야 하나, 우리의 지력(知力, 智力)은 척박하고, 우리의 자기인식은 안이하기만 하다(정종현, 『제국대학의 조센징』).

 

양동운 변호사
●법무법인 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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