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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의 마지막 처형

 1975년 9월의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Bahamonde(1892 ~ 1975)]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 독재정권은, 얼핏 보면 굳건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프랑코의 독재정권은 그 태생적 모순과 국제적 고립, 그리고 내부의 반발로 인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으며, 특히 1975년 9월 27일,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범 5인의 사형 집행은 독재정권을 백척간두로 몰아넣었다.

 1939년, 3년간의 내전에서 공화파 약 20만 명을 죽이고 승리한 프랑코는 36년간 원수(Caudillo)라는 전무후무한 직위를 가지고 스페인을 철권으로 다스렸고, 위협이 될 만한 반대파는 철저하게 뿌리 뽑았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무너졌던 스페인 경제는 1959년부터 1974년까지 매년 평균 6.5%씩 고속 성장하여 스페인인들의 평균 소득은 이웃 프랑스나 이탈리아를 따라잡을 수준까지 올랐다. 반공주의를 견지했던 프랑코는 미군을 자국 영토에 주둔시키는 대가로 미국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다. 1959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스페인을 국빈 방문하여 프랑코 총통과 악수하고 그의 독재정권에 국제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서유럽 각국 국민들은 스페인이 독재정권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바르셀로나와 말라가의 아름다운 해변에서 휴양하면서 돈을 쓰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화와 정치적 억압은 공존하기 어려웠고, 공업화가 가속화된 1960년대부터는 정권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1975년 당시에는 프랑코 정권에 반대하여 무력 투쟁을 벌이는 두 집단이 있었다. 하나는 ‘바스크 땅과 자유(Euskadi Ta Askatasuna, ETA)’였고, 또 하나는 ‘반파시스트 애국 혁명전선(Frente Revolucionario Antifascista y Patriota, FRAP)’이었다. 

 전자는 프랑코 정권의 바스크 문화와 언어 탄압에 분개하여 바스크 지역의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무장 조직이었고, 후자는 독재 타도와 인민공화국 건설, 주요산업의 국유화 등 강령을 내세우며 대학가에서 조직된 극좌파 도시 게릴라 조직이었다. 둘 중에서도 전자의 무장투쟁의 강도가 더욱 치열해서, 1973년 12월에는 정권의 2인자인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Luis Carrero Blanco) 해군 제독을 폭탄으로 암살했고, 1974년 9월에는 경찰관들이 자주 방문하던 마드리드의 카페에 폭탄 테러를 일으켜 13명을 죽이고 71명을 부상시켰다. 

 이러한 테러에 대항해, 프랑코는 1975년 8월 26일 ‘테러 방지에 대한 칙령 10/1975호(Decreto ley 10/ 1975 sobre prevención del terrorismo)’를 공표했다.1)프랑코 정부가 독재라는 점을 감안해도 이 칙령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가혹했다. 테러행위의 대상이 군인, 경찰 또는 안보기관의 구성원인 경우에는 법정최고형을 선고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상기 대상이 테러행위로 인해 사망한 경우에는 사형이 유일한 법정형이었다. 군인 또는 경찰을 대상으로 한 테러행위는 군사법원의 관할이 되었고, 테러 용의자는 영장 없이도 5일까지 구금이 가능했으며, 영장이 없더라도 테러가 발생할 수 있다는 긴박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경찰이 가택을 수색한 후 사후영장을 신청할 수 있었다. 테러 범죄의 피고인은 변호인을 제외하고는 서면을 통해서만 외부와 소통할 수 있었고, 변호인이 공개적이고 중대한 방식으로 소송절차를 방해하면 재판장이 변호인을 사임시킬 수 있었다.

 프랑코 정부는 이 칙령을 빠르게 소급 적용했다. 1975년 8월 27일부터 1975년 9월 16일 사이에 진행된 몇 차례의 군사재판에서 ETA 조직원 3인과 FRAP 조직원 8인이 경찰관과 헌병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군사재판 절차는 공정성을 담보할 수 없는 심각한 절차적 하자가 존재했다. 범행 현장에서 기록된 용의자의 인상착의와 피고인의 외모가 다르다는 증언은 묵살당했고, 심지어 피고인 중 1명은 경찰의 총을 맞아 혼수상태에 빠졌음에도 경찰 수사관이 대신 작성한 피고인 진술서의 내용이 인정되었다.

 군사재판에 대한 대내외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1975년 9월 26일 프랑코가 주재하는 내각은 사형을 선고받은 피고인 11인 중 ETA 소속 앙헬 오타에기, 후안 파레데스와, FRAP 조직원 호세 움베르토 바에나, 라몬 가르시아 산츠, 그리고 호세 루이스 산체스 브라보의 사형 집행을 확정했다. 내각에서 5인의 사형이 확정된 바로 다음 날인 9월 27일 오전, 5명의 사형수는 모두 형장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스페인은 폭발했다. 마드리드 산이시드로 성당에서 2,000명이 참여한 사형수들의 넋을 위로하는 미사는 반정부 집회로 변했고, 바스크 지방에서는 20만 명이 반정부 동맹 파업을 결의했다. 사형 집행은 국내의 반발과 더불어 국제적 고립을 불렀다. 영국, 서독, 이탈리아를 포함한 유럽 15개국이 사형 선고 및 집행에 항의하여 자국 대사를 소환했다. 스웨덴의 중도좌파 총리 올로프 팔메는 스페인 정부를 ‘악마 같은 살인자들’이라고 비난했고, 벨기에 브뤼셀의 스페인 대사관은 화염병 세례를 받았다. 1년 전 카네이션 혁명을 통해 민주화를 이룬 이웃 나라 포르투갈에서는 5천 명의 시위대가 리스본의 스페인 대사관에 난입해 대사관 건물에 불을 질렀다. 유럽경제공동체(EEC)와 교황 바오로 6세 모두 사형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반발과 적대적 여론에 스페인 정부 관료들은 크게 당황했으며, 스페인의 중산층은 동요했다. 유일하게 스페인에 우호적인 성명을 발표한 국가는 칠레의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이었다.

 이미 스페인 정부는 수십 명의 ETA와 FRAP 조직원들을 수감하고 있었으므로, 5인의 처형 이후에 또 수십 명이 총살당할 수 있다는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파킨슨병을 앓던 82세의 프랑코는 10월 중순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늙은 독재자는 병상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했고 결국 11월 20일 자정을 넘어 숨을 거뒀다. 프랑코 사후에도 당분간 기존 체제는 지속되었지만, 더 이상 사형은 집행되지 않았고 정치범들은 사면되었다. 이 점에서 1975년의 처형은 프랑코의 의지로 이뤄졌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스페인의 민주주의로의 이행 이후 FRAP은 자연스럽게 힘을 잃었다. 다만 ETA와 스페인 정부 간의 전투는 2011년에야 ETA의 무장투쟁 중단 선언으로 종결된다.

 프랑코의 죽음 이후 다양한 정치세력의 협상과 타협 속에서 탄생한 1978년 스페인 헌법 제15조는 만인의 생명권을 인정하고, 전시에 군형법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형제를 전면 폐지하였다. 1995년 11월에는 군형법도 개정되어 전시의 사형제도 폐지되었다. 2009년 스페인 정부는 사형을 전면 폐지하는 내용의 유럽인권협약 제13의정서를 비준했다. 스페인의 민주화 과정은 동시에 사형제 폐지의 역사였다.

 1975년 9월 27일의 사형 집행과 이에 대한 국제적 저항은, 사형이라는 제도가 가져올 수 있는 국제적 고립과 도덕적 분노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였다. 또한, 자의적이고 폭력적인 권력의 남용이 도리어 정권의 존속을 위태롭게 한 예시라고 볼 수 있다. 정치범 5인을 본보기로 처형함으로써 프랑코는 자신의 권력의 강건함을 과시하려 했지만(한 인간의 생명을 폭력으로 박탈하는 것만큼 권력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이 또 있을까?) 사형은 도리어 내전 이후 전례 없었던 저항과 고립을 불러왔다. 한 체제가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 극단적인 폭력에 의존하는 순간, 도리어 그 체제는 가장 취약하다.

윤태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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