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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 왜 그런 말들을 했을까
필립 그로닝 감독의 다큐 영화 <위대한 침묵>

“그들은 침묵으로 말한다.” 오귀스탱 길르랑
“경쟁심이나 허영심 없이 고요하고 조용한 감정의 교류가 있는 대화 그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소통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늘의 주제는 언어생활에 관한 필자의 참회록이다. 만약 필자가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제일 먼저 고쳐야 할 것이 말이다. 그런데, 말은 사고와 철학의 소산이므로 결국 마음가짐을 고쳐야 하는 것이 맞겠다.


사람을 죽이던 말들의 추억

 필자가 판검사 시보와 법관 생활을 시작했던 1980년대의 검사실과 법정에서는 존댓말이 별로 쓰이지 않았다. 비록 일부만의 일이었으나, 검사실에서는 피의자에 대한 거센 추궁과 욕설이 난무하는 경우가 많았고, 법정에서는 당사자나 피고인들은 주로 존댓말과 반말이 뒤섞인 질문을 들어야 했다. 도대체 왜 이런 현상들을 공식적으로 문제 삼지 않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래서 자투리 시간을 내어 여러 법정을 잠깐씩 방청하러 다녔다. 고상하고 품위 있는 대화가 오가는 법정들도 많았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기막힌 장면들도 있다. 공소사실을 부인하는 피고인들을 매섭게 추궁하고 힐난하는 장면, 피고인들의 항변이나 애원에 냉소적인 빈정거림을 보이는 장면, 민사사건 당사자들에게 짜증 내고 호통치는 장면들의 추억은 해묵은 위궤양의 통증처럼 쓰라리다. 당시 그런 모습을 보이던 일부 판검사들은 조선시대의 교만한 고을 사또로 빙의 (憑依)하여 당사자들을 한껏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람보가 기관총을 쏘듯 살인적인 말의 실탄을 난사하던 그 사또들의 이름은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다만, 그들은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척척 지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업보(業報)를 다 어이하랴.

『그들은 침묵으로 말한다』 - 봉쇄 수도원에서 온 편지, 오귀스탱 길르랑, 생활성서사


길고 긴 실패의 시간들

 필자는 배석판사를 벗어난 후 평소 느꼈던 반지성적(反知性的)인 법정언어를 순화해 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민형사 단독판사와 부장판사를 거치면서 당사자들이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하는 편안한 법정을 만드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매 기일 재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마다 그날 낮에 진행한 수많은 사건들 중 몇 개 정도씩 필자의 마음에 걸릴 때가 있었다. 그 이유를 반추해 보면, 대개 필자가 과도하게 당사자를 나무라거나 지적한 사건들이었다. 그럴 때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수첩을 꺼내 그 내용을 적었고, 그다음 재판기일에 그 당사자들에게 사과했다. 근본적 원인은 필자가 말이 많았던 것이었다. 어느새 필자도 고을 사또가 되어 유식한 체, 잘난 체하는 말들을 쏟아냄으로써 당사자들을 주눅 들게 하고 힘들게 한 것이었다. 하늘을 우러러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하고 탄식을 거듭했다. 당시 법조인들은 정말 말이 많았다. 큰 법원의 식당에서 주변을 돌아보면 수십 개의 테이블마다 한 사람(재판장)만이 열을 내며 얘기를 하고 있고 나머지 두 사람(배석판사)은 지루한 표정을 감춘 채 묵묵히 밥을 먹고 있는 풍경이 신기하게도 비슷했다. 법원장이나 검사장 등 고위직이 주최하는 만찬에 참석해 보면, 주최자 혼자 무려 2 ~ 3시간 동안 장광설을 늘어놓는 바람에 허리와 무릎이 썩고 정신이 혼미하게 될 때가 많았다. 말의 독과점(獨寡占)은 사람들을 너무나 힘들게 한다.


우리를 살리는 말. 침묵과 사랑

 필자는 예전에 필립 그로닝 감독의 다큐 영화 <위대한 침묵>을 보고 깊은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감독은 무려 20년의 간청 끝에 어렵게 승낙을 받고 프랑스 사르트뢰즈 산맥 정상의 봉쇄 수도원에 들어가 음향, 조명 등 아무런 장비를 쓰지 않고 스탭도 없이 혼자서 카메라 한 대로 수도 생활의 영상과 소리를 담았다. 수도원 뜰에 머무는 햇살과 바람, 빗소리, 회랑을 울리는 발소리, 그레고리안 성가의 단조로운 선율, 기도하는 수도사들의 숙연한 모습,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별이 빛나는 하늘 등만 있을 뿐 내레이션도 대화도 전혀 없다. 긴 러닝타임 때문이었을까, 필자는 화면의 신성함과 평화로움 속으로 깊이 빠져든 나머지 결국 코까지 골면서 자는 바람에 옆좌석 아내의 구박을 받았다. 필자의 인생 영화였다. 법관의 길을 제대로 걸으려면 수도사들의 구도자적 삶에서 영감을 얻어야 한다는 반성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침묵의 힘은 웅변보다 강하다.

 시끄러운 요설(饒舌)이나 악의적 험담, 타인에게 상처가 되는 말들, 거짓말, 아첨하는 말들은 도대체 무슨 가치와 의미가 있을까. 정신을 피폐하게 하고 인간관계를 훼손하는 작용만을 할 뿐이다. 그런 말을 하느니 침묵하는 것이 백번 옳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베드로를 생각해 본다. 베드로는 어부 출신으로서 본래 좀 단순하고 다혈질이라서 예수를 핍박하는 자의 귀를 칼로 자르기도 하는 등 요즘 인기영화에 나오는 마동석 비슷한 격정적 캐릭터였다. 그런데, 예수가 체포되던 날의 밤중에 베드로는 예수의 일당이 아니냐고 따져 묻는 사람들에게 세 번이나 그를 모른다고 부인했다. 예수의 처형 이후 베드로는 자신의 배신과 비겁함을 깊이 참회하고 슬퍼하면서 하염없이 방황하고 있었다. 가슴 저리는 장면은 그다음에 나온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베드로는 그 짧은 한마디에서 구원을 받았다.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베드로에게, 나는 이미 용서했고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으니 힘내라고 위로해 주신 것이다. 나의 언어와 당신의 말들도 이와 같은 순수하고 따뜻한 사랑으로 가득 찰 수 있기를 염원해 본다. 사람을 살리는 말은 이와 같은 것이리라.

황적화 변호사
● 법무법인 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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