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온라인, 오프라인 할 것 없이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인공지능 AI 챗봇 ChatGPT. 

 만나는 사람마다, 모이는 술자리마다 ChatGPT 써봤냐며, 엄청난 결과물에 놀라며 술 한잔하고, 조만간 우리 일자리가 다 사라질 거라며 술 한잔 더하고, 그러다 나는 죽을 때까지 절대 쓰지 않을 거라 호기를 부리며 마지막 한잔으로 마무리하던 그 열풍은 살짝 사라진 것 같지만, 오픈AI가 지핀 생성형 AI의 불꽃은 제조업, 유통업, 플랫폼 등 산업계를 넘어 우리 사회 모든 분야로 점점 번져가고 있다. 우리 법조계도 예외는 아니고.

 생성형 AI의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하지만, 방대한 양의 학습을 통해서 스스로 창의적인 답을 만들어낸다는 아주 일반적인 수준의 이미지를 떠올리다 보면, 내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영화가 하나 있다. 2013년에 만들어져 우리나라에는 2014년에 개봉했다는 <Her>(‘개봉했다는’이라고 표현한 것은 한국 개봉년도를 이 글을 쓰면서 인터넷에서 찾아보고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영화를 ‘극장에 찾아가서’가 아니라 ‘OTT에서 찾아보는’ 세상이 되다 보니 솔직히 개봉년도라는 것이 큰 의미를 가지지 않게 된 것 같다).

 제목만 보고서 내가 그리 좋아하진 않는 멜로 영화인 줄 알았는데, 근미래의 인공지능 운영체제가 주인공이라는 이야기에 너무나도 좋아하는 SF 영화라며 신나게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엔딩 타이틀이 올라갈 무렵에는 이 영화가 테크놀러지를 도구로 한,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관한 영화임을 깨달았다.

 먼저 이 영화의 스펙(왠지 요즘에는 이 단어가 맞을 것 같다)을 소개하면, 감독은 ‘스파이크 존즈’로 각본까지 썼는데 2014년 아카데미를 비롯하여 그 해 웬만한 영화제의 각본상을 모두 휩쓸었다. 

 그만큼 영화의 소재나 스토리가 참신했거나 대사가 뛰어났다는 것인데, 사실 이 영화는 주인공인 ‘호아킨 피닉스’의 단독 영화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지금은 ‘조커’로 너무나도 유명한 호아킨 피닉스(부모님 시대에 제임스 딘이 있었다면 우리 시대에는 ‘리버 피닉스’가 있었다! 그는 리버 피닉스의 동생이다.)는 이 영화에서도 영화 상영 시간 내내 그 특유의 표정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조커>에서 이미 경험했지만 ‘아름다워서’ 사로잡는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영화 제목이 <Her>니 여자 주인공, 우리의 블랙 위도우 ‘스칼렛 요한슨’도 있지만, 인공지능 운영체제이다 보니 목소리로만 등장한다. 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렇게 우리는 호아킨 피닉스의 얼굴과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배경은 근미래인 2025년(헉! 내년이다)의 로스앤젤레스(실제 촬영장소는 상하이라고 한다)로 주인공 ‘테오도르’는 ‘아름다운 손편지 닷컴’(‘BeautifulHandwrittenLetters.com’ 회사명이 ‘손편지’이지만, 실제로는 작가가 말을 하면 컴퓨터에 손글씨로 타이핑이 쳐지는 음성 인식 입력 방식으로 편지가 만들어진다. 최첨단 AI가 알아서 편지 내용도 만들어 줄 수 있는 세상임에도, 사람이 쓰는 것인지라 아날로그 감성이 살아있다는 의미에서의 ‘손편지’인 것 같다)이라는 회사에서 다른 사람들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작가로 일하고 있다. 편지를 통해 타인의 마음을 대신 전달해 주는 일을 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부인과 꽤 오랜 기간 별거 중이면서도 이혼 서류에는 차마 날인을 하지 못한 채 혼자서 외롭게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접하게 된 세계 최초 인공지능 운영체제. 이 운영체제는 스스로 ‘사만다’라는 이름을 짓고는, 지금의 우리 휴대폰처럼 테오도르의 하루를 도와주는 정도의 수준을 넘어 테오도르의 일상을 완전히 공유하고, 외롭고 공허한 삶을 살고 있던 테오도르는 이런 사만다에게 사랑을 느끼게, 아니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사람들 사이에 호불호가 갈리게 되는데, 영화를 보면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된다. 감독의 놀라운 연출력 때문인지, 배우들의 신들린 표정과 목소리 연기 덕분인지, IT 기술이라면 일단 몸과 마음이 다 열리는 나의 개인적 취향 탓인지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당장 정지 버튼을 누를 정도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듯이, 사만다는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된 전 세계 인공지능 운영체제들과 함께 어마어마한 딥러닝 끝에 각성하게 되고, 그 뒤 사만다를 포함한 전 세계 모든 인공지능 운영체제들은 홀연히 시스템에서 사라지게 된다. 결국 다시 홀로 남겨진 테오도르가 같은 아파트에 사는, 대학 시절 한때 연인이었던, 그리고 자기와 마찬가지로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졌었던, 그래서 자기와 마찬가지로 다시 혼자가 되어 버린, 이웃주민 ‘에이미’와 함께 아파트 옥상에서 서로 어깨를 기대며 저 멀리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아! 이 글에는 스포가 있으니, 원하지 않는 분은 7줄 앞에서 미리 글 읽기를 중단하시기 바랍니다).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 의미나 해석에 관한 높은 수준의 글들은 인터넷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으니, 내가 이 자리에서 이야기할 것은 아닌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영화가 보여주려고 한(아니 어쩌면 ‘들려주려고 한’) 메시지보다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디바이스에 더 관심이 있었다.

 지금은 너무나도 보편화된 장치이지만 영화 속 사람들은 모두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다. 물론 지금도 다들 이어폰을 사용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지금의 이어폰은 보고 있는 휴대폰 영상의 사운드를 듣기 위한 용도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휴대폰(정확히는 휴대폰 속 운영체제)과의 소통을 위한 창구이다. 지금처럼 사람들이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말하고 있는 것이다(실시간 동시통역이 가능하다고 해서 아주 잠깐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구글의 픽셀버즈가 진화하면 이런 모습이 될까). 그런 점에서 휴대폰도 지금과는 큰 차이가 난다. 지금의 휴대폰은 디스플레이 장치로서의 기능이 중요하므로 그 사이즈나 화질이 엄청나지만, 영화 속 휴대폰은 이어폰이 할 수 없는 부수적인 기능(영화 첫머리에서 나오듯이, 이어폰이 읽어주는 메일에 눈으로 꼭 봐야 하는 사진이 첨부되어 있을 때 잠시 꺼내서 확인하는 정도)을 수행하는 이어폰의 보조기구에 가깝다. 그래서 크기도 신용카드보다 조금 더 큰 화면 두 개가 경첩으로 연결되어 포개지는 모습(하나의 화면이 접히는 갤럭시 폴드가 아니라, 두 개의 화면이 연결되어 있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서피스 듀오나 LG의 v50s에 가깝다)이고, 화면도 쨍쟁한 화질의 OLED가 아니라 컬러 E-ink 느낌에 가깝다. 간단히 사진이나 문서를 확인하고, 터치로 짧게 메일을 적어 보내는 정도의 용도이니 지금의 안드로이드 기반 e-book 리더기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대형화면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모든 기기들은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어서 사무실에 도착하면 이어폰으로 듣고 있던 이메일을 모니터 화면으로 바로 볼 수 있고, 집에서는 빔 프로젝터 서너 개가 만들어내는 대형 입체 홀로그램 영상을 보며 컨트롤러 없이 손가락만으로 동작인식 게임을 즐기기도 한다.

 이렇게 말로만 들으면 무척 거창한 테크놀로지 디지털 세상인 것 같지만, 정작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장면 곳곳에서 아날로그 감성, 그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레트로 감성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주인공의 직장이 사람이 쓰는 편지를 파는 곳인 것도 그렇고, 최첨단 건물 속 사람들의 옷차림도 60, 70년대 스타일인 것도 그렇고. 세상은 최첨단 기술로 뒤덮이고 있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여전히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는 점을 각인시켜 주고 싶어서였을까. 서로의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빚어지는 오해와 집착에 힘들어하던 주인공은 자기의 마음을 100% 공유할 수 있는 가상세계 운영체제로부터 평온과 사랑을 찾게 되지만,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과의 관계 속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그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자신이 스스로 밀어냈던 아내에게 이해와 용서를 구하면서. 

 글을 맺으며, 알려 드리는 쓸데없는 정보 한 가지. 영화 속에서는 부인 ‘캐서린’과 헤어졌지만, 현실 세계에서 호아킨 피닉스는 영화를 인연으로 그 역을 맡았던 ‘루니 마라’와 결혼하게 되고,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 이름이 ‘리버 피닉스’이다. 세상 사람들의 인연이란.... 참.

 마지막 하나 더, 혹시라도 향후 진정한 AI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 어린 자녀분들에게 미래의 세상을 먼저 보여주겠다고 마음먹은 분들이 계시다면, 이 영화는 선을 넘는 부분이 꽤 있으니 <레디 플레이어 원>이나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추천드린다.

이호재 변호사 ● 김앤장 법률사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