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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마음] 창세기4 - 텐트시티

 창세기4
-텐트 시티

집은 늘 늦게 오는 것인가
산을 넘어
뒤늦게 오는 도시들 속에 세울 집만을
기도하며 바라는가
무겁다. 어디에서 어디로
밤이 재우지 못한 눈물을 이어도
배가 고파서 말하지는 못하는 손들아
짐은 차가운 공기를 만지고
사랑스런 온기는 한번도
찾아보지 못한 자들만이
여기에서 하루 밤을 위해 불을 피운다
인류가 낙원을 잃은 날부터 따라다닌 추위여
너는 너의 집을 아는가 바람이여
천을 펼쳐 일으키고
이웃이 있는 집을 잇게 하라
하루를 잠재우기 위해 세운 도시를
너희가 수고하며 지고 온 집을.
오늘은 여기 세워 낯선 도시를 만드리라
한번은 살아서 어디에도 없는
도시가 지어지고
숲에 둥지를 트는 새들은 잠시 안식하는
하룻밤의 도시. 너는
어디로 가는 것이냐
저물어가는 날을 견디며 세우는 안식의 도시
이 산과 사막의 어디에서
너는 목마를 것이냐 도시여
그들은 산을 오른다 태양이 오르듯이
그들의 손은 하루를 짓느라
매듭이 굵어지고 그 굴곡을 움직여
노래로 집을 짓는다
집을 잃은 자들만이 지을 수 있는 도시
늦어도 늦어도 기다리는
남겨진 텐트들의 도시
가질 것이 없어 창세를 가진 버림받은 자들이
오늘 지고 간 도시.



이 시는 <창세기> 연작 중에 하나로 쓰인 작품이다. 창세기 시리즈는 총 12편으로, 처음 발표된 작품이 「창세기3」이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이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 「창세기4」가 됨으로 인해 창세기 연작은 3에서 4에 이르는 긴 시적 여정으로 기억되게 되었다.

이 글을 읽게 되는 독자들은 <창세기> 연작을 아마 잘 모를 것이라 생각한다. 시 한 편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되는 지면에서 이렇게 연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내가 쓰는 시들이 대부분 서로 어깨에 어깨를 기대고 있듯 서로 다른 지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어져 있는 연작이 많기 때문이고 여기 소개하는 「창세기4」의 경우는 그런 경향이 가장 강한 <창세기> 연작의 주요 작품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창세기> 연작은 처음 지면에 발표되면서부터 성경의 ‘창세기’에 대한 주석이라고 읽혀왔다. 일부는 그런 작품이 있지만, <창세기> 연작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창세기4」는 성경의 <창세기>와 오늘날의 어느 장소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삶의 한 국면 사이에 놓여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창세기>의 첫 부분들, 예를들면 천지창조와 같은 내용들이 <창세기>의 주요 내용이라고 생각하곤 하는데 <창세기>에는 자신이 정착할 곳을 찾아 길을 떠나는 한 족속의 이야기도 주요 내용으로 다루어진다.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가나안 땅에 자리를 잡게 되는 이 여정의 경로에는 많은 생략이 자리한다. 그런데 사실 생략된 이야기 사이의 공백에는 이야기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믿음의 조상마저도 흔들었던 것이나 우리에게 조상이 되지 못한 자들에겐 전부인 그런 것이다. 

기억되지 못한 자들에게서 물려받은 것. 나에게 시는 이것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창세기4」도 그러하다. 아니 이 시는 그것을 더욱 기원화하여 현재로 돌려놓기 위한 시도였다. 이것을 이끄는 힘, 시작 동력이 되는 것, 그것은 내가 물려받은 그것을 ‘삶’이라고 호명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삶은 우리에게 어떤 것인가? ‘창세’를 여는 때에 ‘삶’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이야기 안으로 숨어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공백이 되거나 생략되어 가는 매일. 그것이 짐 지고 와 펼쳤다가 다시 사라지는 것으로 치부되는 삶은 그렇게 오늘날에도 삶이란 우리 생의 ‘집’이 우리에게 더 깃들지 못하게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충분히 말로 표현해내지 못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삶이 위협받는 세계임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 우리가 이 땅에 와 삶을 영위하는 것, 그 자체는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살아있음, 그것은 우리가 삶의 권리이며 권위임을 알리는 말이다. 그러나 이 ‘삶’은 그 자체로서는 오늘날 ‘짐’이 되었다. 삶은 우리에게 모든 가능성을 주고 그것을 열어나가는 공간이자 시간을 내포하는데,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이 가능성을 매순간 평가하고자 한다. 삶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자 가치인데, 우리는 삶을 경쟁으로 내몬다. 삶이 평가되기 시작하면서 누구도 자신의 삶 그 자체를 기꺼워하지 않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이 나아감은 아마도 “창세”에서부터 지금까지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의 몫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말해지고 있지도 않고 이야기되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에도 매번 다시 노래되는데, 그것은 노래가, 시가 ‘창세’의 빛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도 ‘조상’도 ‘능력’도 ‘번영’도 ‘역사’도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에게, 세계에서 잊히고 지워지면서도 늘 우리의 오늘에 건네진 존재들에게 남겨진 것은 ‘창세’다. 삶으로 세계를 열고 세계를 다시 우리에게 건네 줄 수 있는 힘. 그것은 지워지면서도 살아내는 힘, 삶을 우리에게 돌려 주는 용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누구나 아무나 그리고 무가치하다고 평가받는 자들의 것이다. 시는 아무 힘도 없고 세계를 바꿀 수도 없으며 누구를 구할 수도 없는 나약한 말들의 모듬이지만 시는 누군가에게 따듯한 온기가 되어 자신의 삶을 살게 한다. 살아내게 한다. 누구나에게 그것은 <창세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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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중 시인 
2009년 『문학사상』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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