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만남, 첫사랑, 첫눈... ‘처음’이라는 단어처럼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무엇이든 처음 경험한 일은 나이를 먹고 세월이 흘러도 뇌리 속에 깊이 박혀 쉽게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일까? 연수원 수료 후 3년간의 법무관 생활을 마치고 서초동 고용변호사로서 내 이름을 걸고 수임한 첫 사건은 벌써 2년 전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기억이 생생하다.
입사 후 3개월 갓 지나 사무실 분위기에 적응하기도 버거웠던 어느날, 법무관 시절 같이 운동을 하며 알게 된 고향 후배로부터 연락이 왔다.“행님, 저 좀 도와 주이소. 제가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저한테 소송을 걸어가(걸어서) 모레 법정에 출석하라는 통지가 날라 왔습니데이.”전화 너머 후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배의 이야기인즉 자기는 선박 및 해상구조물 운항과 관련된 전기전자장비 제조판매업을 주로 하는 D주식회사라는 중소기업에서 7년 넘게 일을 하다가 얼마 전 방위산업제품 및 관련제품 개발제조 등의 사업을 영위하는 A대기업 계열사로 이직을 했는데, 박봉과 열악한 근무조건으로 악명이 높은 D주식회사에서 자기를 비롯한 직원들의 이탈이 늘어나자 이를 막기 위해 자기를‘시범케이스’삼아 전직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공익법무관으로서 법률구조공단에서만 3년 내리 근무한 경력이 있었기에 적어도 소송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없었으나, 가처분신청 사건은 이전에 대리해 본 적이 없었고 무엇보다 어떻게 수임 약정을 해야 할지 혹시 내가 사건을 잘못 수행해 패소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후배에게 선뜻‘그 사건 내가 맡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가처분신청 사건은 적시에 다투지 않으면 더 이상의 소명기회도 없이 인용될 가능성이 높고, 패소해도 좋으니 최선만 다해 달라는 후배의 간곡한 부탁을 더 이상 거절하기도 어려워 나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 용감히 부산행 KTX에 몸을 실었다.
고향에 돌아온 나는 고향집에 짐을 풀 겨를도 없이 내가 도착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후배(의뢰인, 피신청인)와 끼니도 거른 채 5시간이 넘는 마라톤 대면상담을 했다. 가처분신청의 내용은 ① 신청인은 피신청인이 신청인 회사에 재직하던 중 수중수상경계로봇, MDV, 전투체계 등의 업무에 종사하며 신청인 회사의 핵심기술과 경험을 지득·축적하였고, 특히 주요 영업비밀이 담긴 파일을 A대기업 계열사로 유출시키려 해 비밀유지 약정을 위배하였고 ② 피신청인이 근로계약서상 근로계약 종료 후 2년 이내 신청인의 영업비밀이 누설될 수 있는 동종, 유사업체에 이직해서는 안 된다는 전직금지 약정을 위배하였는바, 피신청인게 2년의 전직금지 및 월 100만 원의 이행강제금 지급을 구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얼핏 보기에는 상당히 정치한 가처분신청서였지만 후배의 설명을 듣고 보니 실제로는 매우 허술한 논리와 입증자료로 점철된 억지 소송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먼저 영업비밀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피신청인이 지득·축적하고 있다는 기술과 경험이 공연히 알려져 있지 아니하고, 독립된 경제적 가치를 가지며, 상당한 노력에 의하여 비밀로 유지될 것 등의 엄격한 요건을 구비해야 하는데, 신청인은 그에 관한 최소한의 주장이나 소명도 하지 못했을 뿐더러 선결적으로 영업비밀의 범위와 내용이 무엇인지조차도 특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직금지 약정 관련해서도 신청인은 전직금지 약정의 유효성을 먼저 소명해야 할 것이나, 피신청인은 근로계약서 내용 중 전직금지 약정이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른 채 근로계약서에 서명을 하였다는 점,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피신청인이 전직금지 약정을 통해 지키고자 하는 사용자의 이익(영업비밀)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다는 점, D주식회사와 A대기업 계열사가 동종·유사 업체라 보기 어렵다는 점, D주식회사와 A대기업 계열사에서의 피신청인 지위나 직무 내용이 서로 다르다는 점 등 어느 모로 보나 전직금지 약정이 유효하다고 볼 만한 여지는 전혀 없었다. 나는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관련 대법원·하급심 판례와 논문은 모두 찾아 읽고 우리 의뢰인에게 유리한 내용은 적극적으로 발췌해 서면에 원용하는 한편, 나와 마찬가지로 잠수함, MDV 등 방위산업기술 쪽으로는 전혀 문외한일 판사를 설득하기 위해 의뢰인과 의기투합하에 국방기술연구서, 학회지, 해외사이트 및 전문적인 기술논문까지 샅샅이 뒤져 비전문가도 이해하기 쉽도록 최대한 서면을 간결히 정리하고 체계화시켰다. 누가 보더라도 논리는 탄탄하고 자료는 풍부하여 우리가 100% 승소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법원의 결정은 뜻밖이었다. 신청인이 청구한 2년의 전직금지 및 월 100만 원의 이행강제금 중 절반인 1년의 전직금지 및 월 50만 원의 이행강제금이 인용된 것이다. 얼핏 절반의 성공이라고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이번 결정으로 남은 8개월 동안 어느 회사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강제휴직을 해야 하는 돌잡이 딸을 둔 한 집안의 가장인 피신청인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현실이 되어 버렸다. 애당초 100% 승소를 자신하였기에 가처분신청 전부기각만을 승소요건으로 삼은 나 역시 성공보수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외견상 절반은 이겼지만, 나도 우리 의뢰인도 전부 패소한 것과 다름없는 사건이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법원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다만 법원으로서는 우리 당사자의 구체적 사정 못지않게 우리 사건을 계기로 직원들의 엑소더스가 예상되는 신청인 회사의 사정도 함께 고려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짐작해 볼 따름이다.
어쨌든 나의 첫 경험(?)은 이렇듯 아찔하고도 씁쓸한 추억만 남긴 채 역사 속 한 페이지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 해 가장 뜨거운 시간을 보낸 나의 열정만큼은 내가 변호사생활을 하며 매너리즘에 빠질 때마다 나를 일깨우는 채찍이자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힘으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담금질하며 하루하루 어제보다 나은 실력을 갖춘 변호사로 성장해 갈 것이다.
조태진 변호사
사법시험 제49회(연수원 39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