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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음] 삼천리 인생

 삼천리 인생

폐물이 될지 몰라 걱정스런 표정이다
늑골은 엿가락처럼 구부러져 있고
꽃잎 스티커가 벗겨진 곳마다 녹슬어 있다
터진 혈관을 흉측하게 드러낸 타이어에는
오래 달려온 거리만큼
시커멓게 타들어간 마찰음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천리는 더 갈 듯 한 바퀴살이 바퀴를 받치던
팽팽한 장력으로 포구의 귀퉁이를
살살 바다로 밀치고 있다
어스름이 포구 쪽으로 감겨올 때쯤
밀물이 들어 바퀴살이 물살에 빨려든다
구부러진 늑골을 펴는 듯한 물살이
매끄러운 안장에 홀짝 올라탄다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지?
마침 수평선에서 잠수하던 달빛이
포구의 귀퉁이로 펼쳐놓는 물결은 기차다
물결 따라 자전거 손잡이는 보이다 사라지곤 한다
자전거를 어디로 몰고 가려 했을까
잘 모르겠지만 오늘은 끝까지 달리자
항상 충실히 달리다 막장에 온 삼천리 인생
귀퉁이를 버리고 신나게 달려보자
앞을 가로막은 방파제에 부딪히며
지상으로 페달을 밟는 수억 만개의 물방울처럼
녹슬고 굽어있던 나의 영혼이 힘껏 페달을 굴린다
꼿꼿이 윗몸을 세우고 양 팔을 벌리자
포구가 바다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정말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다



나의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온갖 추억들이 자전거를 타고 달려온다. 그 시절의 추억들을 인화한다면 자전거가 빠짐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면소재지에 있는 학교까지 걸어서 40분, 자전거로 5분 거리였다. 그렇다 보니 자전거만큼 좋은 교통수단이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중학교에 진학했던 형은 삼천리 신사용 자전거를 아버지에게 선물로 받았다. 덕분에 나는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고 나와 작은 누나는 형의 자전거에 매달려 등교를 했다. 자전거 손잡이와 안장 사이에 내가, 뒷자리에 누나가 앉았다. 형의 자전거는 바람을, 아침안개를 가르며 싱싱 달렸다. 그러나 나는 엉덩이가 저리고 아픈데도 꾸욱 참아야 했다. 그때는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였으니 얼마나 엉덩이가 아팠겠는가. 더군다나 형은 자전거 주인이라는 이유로 내가 늦잠을 자거나 잠깐 늦장을 부리는 날마다 매몰차게 떠나 버렸다. 그런 날엔 오 분도 기다려 주지 않는 매정한 형을 원망하면서 홀로 등교를 해야 했고 내게도 자전거가 생기길 꿈꾸었다. 형의 눈치를 보며 자전거를 얻어 탔던 날들도 형이 도회지로 대학을 가면서 끝났고 형의 자전거는 내 차지가 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방과 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는데 오토바이와 충돌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나는 공중으로 부웅 떠올랐지만 다행히 맨바닥이 아닌 모래더미로 떨어져 다친 곳이 없었다. 그 후 한 번 더 사고가 났지만 자전거는 무사했고 강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버지는 형에게 그랬듯 삼천리 탱크 자전거를 내게 선물했다. 신사용과 탱크의 차이는 뼈대와 바퀴의 두께였다. 더욱이 신사용은 어른용으로, 탱크는 청소년용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려서 당시 신사용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친구가 없었다. 당연히 형의 신사용 자전거는 유행이 지난 낡아빠진 물건 취급을 받으며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예전 자전거가 아깝긴 했으나 새 자전거를 가졌다는 들뜬 내 맘은 삼천리를 달리고도 남았다. 가만, 형이 물려줬던 삼천리 신사용 자전거가 어떻게 되었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필요하거나 있을 때만 소중했지 필요가 없거나 더 나은 게 생기면 버림받는 건 매한가지다. 인연도 헤어지면 잊히는 게 당연지사인데 안타까운 마음은 어찌할 수 없다.

포구에 가서 소란스런 마음을 다스렸던 적이 있다. 사람들은 마음이 답답할 때면 바다를 찾아가지 않는가. 포구 귀퉁이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다가 바닷물에 잠겨 있던 삼천리 신사용 자전거를 목격하였다. 자전거를 보면서 오만 생각에 잠겼다. 혹시 자전거의 주인이 생의 막장을 여기서 보낸 게 아닐까 하고 추측도 했으나 이내 주인이 자전거를 버린 것이라 단정 지었다. 나는 자전거를 유심히 관찰했다. 저 버려진 자전거도 누군가에게 추억을 남겨줬을 텐데……. 어쩌면 나 같은 주인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귀퉁이에 자전거를 방치해 놓고 다시는 찾지 않은 사람일 수도. 그렇게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니 서글퍼졌다. 삼천리는 더 달려야 할 자전거가 달릴 수 없다는 건 다리가 멀쩡하게 있는데도 걷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나의 마음은 삼천리 자전거를 타고 바다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자 내가 서있는 포구가 바다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세상 일 잘 안 되면 어떤가, 녹슬고 구부러지면 어떤가, 온 힘을 다해 살면 걱정할 게 있나, 생각하면서 나는 마음의 손잡이를 부여잡고 포구를 빠져나왔다. 오늘도 포구에 남은 삼천리 자전거가 누군가의 추억들을 싣고 망망대해를 항해하고 있을 것이다.


수_윤석정(증명).jpg

윤석정 시인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오페라 미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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