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레버 일기
― 바이세 엘스터 강
나는 주말 오전을 온전히 침실 안에서 보내고 싶었지만
엊그제 한 약속을 잊지 않은 아이 손에 이끌려
아침부터 외출을 해야 했다
할머니가 정성스레 만든 족발 요리를 남기지 않는다면
강변에 데려갈 것이란 약속이었다
주말 오전의 햇빛은 버려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더 묵혀야 했으나 너무 일찍 꺼낸 밀반죽처럼
주말 오전의 풍경은 충분히 부풀지 않아
찰기를 잃고 하얗게 떠 있었다
한껏 아껴두었다가 한꺼번에 쬐야할 볕을 서둘러 맞닥뜨린 나는
집을 나서자마자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강변까지는 수백 미터 거리여서
아이와의 걸음으론 한 시간은 족히 걸어야 했다
걷는 동안 아이는 나와 가로수와 표지판과 상점의 가판대 주위를
번갈아가며 돌고 돌았다
나보다는 몇 곱절 더 먼 길을 가던 아이가 물었다
강은 언제부터 흘렀느냐고
네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강은 흐르고 있었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럼 강은 그전 언제부터 흘렀느냐고 아이가 물었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강은 흐르고 있었다고
나는 대답했다
태어나기도 전의 일을 아빠는 어떻게 아느냐고 아이가 물었다
지금 너에게처럼 나도 할아버지가 알려줬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럼 아빠는 할아버지의 말을 모두 믿느냐고 아이가 물었다
강변은 아이와 내가 출발하기 전부터
사람들로 붐비고 있을 것 같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일로 독서를 꼽을 만큼 문학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고등학교 진학과 동시에 문학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문학 선생님 때문이었는데, 선생님이 젊고 예쁜 분이어서가 아니었다. 그 분은 특전사 출신의 아주 무서운 남자였다. 고1 초반 문학에 관심 없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문학 시간에 다른 과목 숙제를 하다 걸려 선생님께 된통 혼이 나고 말았다. 그때부터 본의 아니게 문학 수업에 집중하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시’라는 것이 내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었다. 뭐랄까, 초감기에 먹는 감기약처럼 알싸하게 시라는 게 몸으로 퍼지는 느낌이었달까?
그렇게, 갑자기, 시가 좋아졌다. 그래서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소개한 동네 조그만 백일장에 나가게 되었는데, 난 그 흔한 입선에도 들지 못했다. 열심히 썼는데, 감성 어린 문장들을 켜켜이 적어 나갔는데 상을 안 주다니. 난 자존심이 상했다. 그때 난 뭐든 잘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다음 날 바로 문학 선생님을 찾아가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물었다(훗날 이런 삶을 살게 될 줄 모르고 말이다). 물으면서 기대했던 건 선생님의 세세한 피드백이었다. 하지만 여차여차한 설명 없이 선생님은 시를 ‘감각적’으로 쓰라고 말씀하셨다. 내 시는 관념적이라는 말도 덧붙여 주셨다.
난 그 감각이란 게 뭔지, 관념이란 건 또 도대체 뭔지 알 길이 없었다. 거기에 대한 해답을 얻고 싶어 다시 교무실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시를 쓰고 싶으면 시집을 읽으라는 말만 해 주셨다. 그때 선생님의 반응이 조금 매몰차게 느껴져서 좀 서운하기도 했는데, 돌이켜 보면 그것은 선생님의 사려 깊은 교육 방법이었다는 확신이 든다. 그때부터 이래저래 시집들을 사서 보기 시작했는데, 오규원의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는 고3 올라가던 겨울에 읽은 기억이 있다. 그때 원주에서 가장 큰 서점은 시내 한복판에 있는 동아서관이었는데, 그곳에도 시집은 많이 구비돼 있지 않아 따로 주문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규원의 그 시집 역시 따로 주문해서 구입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날이 어머니 병간호 당번 날이었다.
나는 모두가 잠든 6인실 어두운 병실 비좁은 보호자 간이 침대에 엎드려 시집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첫 시부터 마지막 시까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거기엔 내가 찾아 헤매던 감각이란 것이 들어 있었다. 거기엔 문장이 들어 있지 않고 장면이 들어 있었다. 거기엔 문학이 들어 있지 않고 그림이 들어 있었다. 사실 아직도 시적 감각이란 것에 대해 확신할 깜냥은 나에게 없지만, 그때 그것은 내가 알고 싶었던 감각의 일부분이 분명했다. 한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 나왔다. 모두가 잠든 병실에서, 뒤이어 나온 어머니의 잔소리와 함께.
시간강사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 학교에 머문 시간이 어느 정도 되다 보니 후배들이나 학생들에게 간혹 듣는 질문이 있다. “시를 어떻게 써야 하나요?” 거기에 보태어지는 세부적인 질문의 내용에 따라 대답이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대체로 내가 그 질문에 답하는 방식은 이렇다. “아름다운 문장보다는 아름다운 장면을 생각하자.” 이것이 ‘어떻게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어울리는 대답일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시를 맨 처음 접했을 때나 지금이나 내겐 똑같은 무게로 다가온다. 과연 내가 어떻게 시를 쓸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에 대한 고민이 등단 이후 꽤 오랫동안 나를 옥죄고 있었던 것 같다. 원고 청탁이 들어올 때마다 시를 썼지만, 그때마다 괴로웠다. 말 그대로 시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습작할 때는 그런 고민에 시달리지 않았었다. 내가 무엇을 쓰건 어떻게 쓰건 간에 그것은 완성될 리 만무하단 생각이 앞섰기 때문에 시를 쓸 때 어떤 부담 같은 걸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등단하고 나서 생각지도 못한 고민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시인이 되고 나면 마냥 좋기만 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문제는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가 아니라 “시는 어떠해야 하는가”이다. 시가 언어로 지은 집이라면, 그리고 언어가 소통의 매개라면, 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시를 처음 마주한 고등학생 때 나는, 어떤 정념 같은 것들을 언어화 시키는 게 시라고 믿었다. 그러나 시를 계속 읽고 쓰다 보니 언어라는 건 아주 한정된 무엇이라는 걸 깨달았다. 한정된 언어로 시를 쓴다는 것은 정념을 체계화하고 관습화하는 일에 불과했다. 결국 시를 통해 내 정념의 본질을 누군가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 있기는커녕, 내 스스로 그것을 고스란히 기록할 가능성도 없었다.
이제 내 시는 일종의 색연필이면 좋겠다. 크레파스나 아크릴물감, 혹은 고무찰흙이면 좋겠다. 누군가 함부로 벗어놓고 간 그림자나 만난 적 없는 사람이 바라보는 노을이면 좋겠다. 그래서 내 시는 그것들이 모여 만든, 그것들을 빚어 만든, 딱 한 장의 그림, 딱 하나의 조형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므로 매번 얘기하던 “아름다운 장면을 생각하자”라는 말은 누군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닌 내 스스로에 대한 채근일 것이다.
임경섭 시인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