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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다마스커스의 추억, 동방의 진주 시리아
2011년 아랍의 봄의 영향으로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 국가들이 어수선하던 시기에, 시리아 거래선과의 협상을 위해 다마스커스를 방문했다. 시리아는 공산 독재의 영향으로 한국과 수교가 없어 대사관도 없는 상황에서 LG 전자가 지점을 설립하고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한 국가로, 중동에서는 터키, 이란, 이라크, 사우디, 이집트 다음으로 큰 시장이고 중동의 강대국 중의 하나이다. 필자는 시리아를 큰 관심과 애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최근에는 ‘쿠르디’라는 3살 어린이가 터키의 한 해수욕장에서 숨진 채 발견되면서 전 세계가 시리아 난민사태에 대해 집중하고 있어 우리 국민들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인 2011년 6월은 시리아 내전이 본격화되기 전으로 정부군과 반군의 대치가 시작되던 시점이었고, 다마스커스 시내에서는 정부군을 옹호하는 친정부 시위대가 바샤르 알 아사드(이하 ‘아사드’) 대통령 세력의 지원을 받아 시위 아닌 시위를 하고 있었던 때이다. 다마스커스 이외 지역에서 반군의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시내 한 복판에 있는 Arjaan Rotana 호텔 숙소에서 내려다 본 시위 현장은 2002년 월드컵 당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을 외치던 우리들과 아주 유사하게 “시리아 만세”, “아사드 대통령 만세” 등을 외치고 있었고, 불안하기보다는 우스운 상황이었으나, 필자가 시리아를 벗어난 다음날인 2011년 6월 23일 이후부터는 유혈사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하루에도 수십에서 수백 명이 죽어 나가는 아비규환이 되었다. 시리아 사태로 사망한 사람은 수십만 명, 난민도 수백만 명에 이른다.

한국인이 알고 있는 시리아는 북한과 가까운 독재국가이면서 이슬람국가라는 정도일 것이다. 시리아라는 단어는 ‘동방의 진주’라는 뜻의 앗수르어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필자에게도 시리아는 낯설고 먼 나라였지만, 중동에 온 지 6년이 되어가는 지금의 시리아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고,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서 바울로 변화된 ‘다메섹(다마스쿠스)’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면서, 근세에는 ‘아라비아 로렌스’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의 배경이 된 아랍통합운동의 중심지로 다가와 있다. 시리아는 사업가능성을 간파한 한국인 친구가 현지 재벌회사에서 사업을 하면서 열심히 공을 들이고 있는 잠재 시장이지만, 두바이에서 사귄 가장 친한 친구 중의 하나인 시리아 변호사의 부모, 형제, 가족이 고통 받고 있는 생지옥과 같은 곳이기도 하다. 

시리아 내전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던 시점에 친구 변호사를 통해 들었던 시리아는 한 치도 안 보태고 지옥이었다. 친구의 부모 가족이 함께 모여 살던 ‘알레포’라는 지역은 정부군과 시민군의 대치가 가장 격렬한 지역인 데다, 그 대치점에 부모 가족이 모여 사는 집이 있다고 했다. 공습으로 사촌 형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 애기들을 부모님이 건사해야 하는 상황에, 몇 달 전 친형이 정부군에게 잡혀간 이후로 온갖 수단을 다 써보고 있지만 발만 동동 구르는 상황에서, 친구가 벌어들이는 적은 수입으로 세 아이와 가족을 건사하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데, 대부분의 돈을 시리아로 보내고 있었다. 2014년 11월경에 돈을 조금 쓰기는 했지만 친형이 무사히 돌아왔다고 해서 함께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2015년 1월경에 부모님께서 두바이를 방문하셔서 인사를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실제보다 훨씬 나이들어 보이시는 친구 아버님께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시리아인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두바이 입국이 불허되는데, 친구가 그 특별한 사정을 만들어서 두바이에 모시기는 했지만, 모든 친인척을 두바이로 데려올 수 없는 이상 알레포에서 다른 가족을 돌보시겠다며 사지로 다시 돌아가셔야 하는 상황이 더욱 안타까웠다. 

시리아를 방문했던 2011년 6월 중순의 두바이 날씨는 40도를 웃돌았고, 50도까지 치닫는 본격적인 여름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였다. 하지만, 시리아를 방문하던 날 밤 다마스커스 공항의 날씨는 매우 쾌적했다. 이런 이유로 2천 5백만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내로 접어들면서 저 멀리 다마스커스 시내가 한눈에 들어 왔다. 넓게 펼쳐진 산맥 아래로 도시의 건물들이 뿜어 내는 아름다운 빛들이 조화를 이루어서인지, 휴화산처럼 차분해 보이는 다마스커스는 5천 년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폐허가 된 적이 없는 고도답게 엄청난 무게감을 보이면서도 나즈막한 눈빛으로 필자를 환영했다. 평온하고 아름다웠던 다마스커스 시내 한 식당에서의 저녁 식사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리아 정세와 사업의 불투명성에 대해 고민하면서 상황을 투덜거리고 있었지만, 다마스커스는 필자에게 평온함을 주고 있었다.

인류가 거주한 도시 중 가장 오래된 도시로 기원전 3,000년 전부터 단 한 번도 폐허가 되지 않았던 도시인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둔 시리아는 알파벳을 발명한 페니키아인을 조상으로 두고 있는 동서양의 통로가 되었던 나라이다. 그 이후에도 메소포다미아 문명, 신바벨로니아 제국, 페르시아제국, 마케도니아 제국 등의 세계 역사의 주요 무대가 되었고, 로마시대에도 3명의 황제를 배출한 동방의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나라였다. ‘팔미라’유적지는 “뜨거운 모래 사막 한 가운데 땅 속에서 솟아난 듯 한 천상의 도시”라는 칭송을 들을 만큼 아름다웠던 곳으로‘동방의 소로마’라고도 한다.

시리아가 이슬람 세력의 지배권으로 편입된 것은 십자군 전쟁과 수많은 침략 끝에 우마이아 왕조가 다마스커스에 세워진 때부터이다. 우마이아 왕조의 창건자인 살라딘의 무덤도 다마스커스에 있다. 이 시기에 이슬람의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분열도 시작되었다. 시리아 인구 중 대부분의 국민인 약 75%는 이슬람 수니파이고, 약 15% 정도가 이슬람 시아파이다. 성경의 배경이었던 때문인지, 기독교인도 10% 정도가 있다. 

필자는 4년 전부터 시리아인들을 비롯한 아랍인들과 시리아 사태의 특수성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대안을 고민했었다. 시리아 사태는 세습되는 독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봉기에서 출발한 내전이면서 소수의 시아파에 의해 지배당하는 다수의 수니파의 절규에 찬 반란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이란, 러시아, 중국 등 주변국들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해결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고, 석유 자원이 거의 없다 보니 서방에서도 선뜻 본 사태를 정리하기 위해 자원을 투여할 수 없는 사정이 되었다. 이란에게 시리아는 지중해로 나아가는 주요 통로이자, 다수인 수니파를 견제할 수 있는 완충지대의 역할을 하였고, ‘다르투스’라는 항구에 러시아의 해군기지가 있다는 사실을 보면 시리아가 러시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 수 있다. 여기에 서방의 독주를 막으려는 중국 역시 이란 및 러시아와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으니, 시리아라는 나라를 손쉽게 요리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정부군이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시리아 문제를 쉽게 해결하기 어렵게 한다. 

IS가 세력을 확장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시리아 내전은 정부군을 지지하는 이란, 이라크 및 시아파 게릴라 조직인 헤즈볼라에 대응하여, 시민군을 지지하는 75% 이상의 수니파 국민, 대부분 중동국가, 알카에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의 세력이 맞서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최근에는 이에 더해서 IS라는 수니파 극단주의 세력(시리아, 이라크, 터키 남부 지역 등 그 범위가 독립국가로 인정될 수 있을 만큼 커졌다)의 창궐로 시리아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리비아, 이라크, 이집트 등 아랍의 봄이 실패하면서 중동지역에서 이슬람주의의 재부상이라는 결과를 지켜본 서방에서는 시리아에 손을 대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3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란의 목을 조이던 미국과 서방도 자신들의 방식으로 중동지역을 컨트롤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었는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수니파의 맹주인 사우디나 GCC(the Gulf Cooperation Council, 사우디, UAE, 카타르, 오만, 바레인, 쿠웨이트 6개 국가의 협의체로 아주 강한 공동체) 국가들이 반대하더라도 시아파의 맹주이자 역사의 주도자이었던 이란에게 지역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판단했는지도 모르겠다. 셰일 혁명으로 유가는 하락하고, 세계에서 중동의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이 전보다 많이 낮아졌다. 자원을 이유로 무차별한 전횡을 하기에는 명분도 약하고 ‘투자효용성(?)’도 현저히 떨어졌다. 

중동지역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부분의 중동 사람들은 서방 중심의 언론이 세상을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천년 이상 서양 문명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히고, 근세에도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사람들이 그들을 좋아할 리 없다.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고 있지만, 머니게임(money game)의 링 밖으로 몰린 사람들은 이슬람 종교라는 대의를 내세워 극단으로 치닫는다. 정교의 일치와 정교의 분리는 문화와 역사의 산물이다. 최소한 이슬람 국가에서는 정교가 일치하기 때문에 종교의 충돌은 문명의 충돌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이러한 충돌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종교적 교리는 이성적일 필요도, 합리적일 필요도 없다. 신께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면 절대적인 것이다. 이렇게 출발한 문명의 충돌은 그렇지 않아도 복잡하고 거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 것이고, 우리 모두를 절망으로 이끌 수밖에 없다. 

짧은 인류 역사는 끊임 없는 정복과 전쟁의 역사였다. 역사의 주요 무대가 아니었던 곳이라도 부족 간의 싸움은 있었고, 다행스럽게 문명이 늦게 침투한 곳에서는 피를 조금 덜 흘렸던 것 같다. 석유 때문에 중동과 아프리카는 많은 피를 흘렸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던 GCC 국가들은 석유 자원 수탈에 따른 대가로 비교적 안정적인 왕정과 경제성장이 기반이 된 정치적 안정을 누렸지만, 이를 거부했던 대부분의 나라들은(아마도 알제리가 유일한 예외가 아닌가 싶다) 국정이 파탄 나고 사람들은 고통에 처해졌다. 

이제 남은 것은 그들을 인정하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안정되거든 동방의 진주 시리아를 즐겁게 여행하고 싶다. 전쟁이 끝나고 다마스커스에서 와인 한 잔과 함께 시샤(물담배)를 즐길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 바란다. 

수정됨_서울변협 방문 사진.jpg


2015. 9. 15. 
김현종 변호사
사법시험 제47회(연수원 39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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