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초등학교 입학 전, 강 건너편으로 다리가 놓였다 어머니는 그 강을 건너 식당으로 가고 나는 강 이편에서 어머니를 부르며 걸었다
강은 내 어머니를 강 건너로 데려가고 우리 형을 이 세상에서 데려가고 죽은 할머니에게 한척의 배를 마련해주었다
취한 아버지는 젖은 풀밭에 앉아 땀 흘리고 누나들은 송사리떼를 쫓아 공장으로 가, 나는 죽은 채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행복했던가
욕심이 많아 모든 것을 빼앗긴, 죽지 않고 버티다 몇년을 더 살다, 허리에서 잎사귀를 뱉어내는 나무를 보며 이곳에서 걸어나갔는가
뒤안에 구슬을 묻고, 흘러갔는가 그 다리를 건너 어머니가 돌아오고, 죽은 할머니가 화를 내며 건너오라 울어도 홍수에 떠내려간 다리 밑에 서서
웃는 식구들을 본다 삶은 옥수수를 들고 평상에 앉아, 뭉게구름처럼 늙어가는 어머니, 철없이 합창을 하는 어린 누나들
나를 찾으러 올 것이다, 밥 먹으라고, 목이 쉬도록, 내 이름이 메아리로 돌아와 나를 흔들 때까지
글씨를 쓴다, 물 위에, 쪼그려앉아, 처음으로, 어둠이 앞다퉈 몰려와 얼굴을 지울 때까지
이제는 나를 용서하고, 나를 이해해야 한다고, 흙 속의 구슬처럼 우는, 나를 용서해야 한다고……
물그릇이 꽝꽝 얼어붙는 추위 속에서 생일을 맞이한 적이 있다. 자취방 가스버너로 물을 끓이며 추위를 견디려고 점퍼를 입고 잠이 들던 밤. 나는 북극곰처럼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곳이 북극보다 더 춥다는 생각을 한다.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과연 책 속에 있는가. 시 속에 있는가. 오직 조그만 불꽃 한 점에 구원이 들어있지 않은가.
길거리에서 아이들이 장난치며 서로의 생일을 축하해 주며 뛰어다닌다. 폭죽을 들고 흔드는 아이들. 추위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 서로 눈덩이를 던지며 달아나고 다시 뒤쫓는다. 남들의 눈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즐거움을 만끽한다. 그런 장면을 보면 한편으로 부럽고 다른 한편으론 쓸쓸해진다. 나는 이 세상에서 이방인 같다. 저들은 모두 인간이고 나만 곰처럼 어슬렁거리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생일날 무엇을 받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하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어색하고 조금 신기하기도 하다. 누나가 집에 다녀갔다. 생일 선물을 두고 갔다고 문자를 남겨서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돌아왔다. 혹시 상하는 물건을 두고 간 게 아닐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어릴 때야 기쁜 마음이겠지만 이제 마흔이 다 되어가는 나이라 그런지 선물을 받아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무엇인가를 받은 기억이 거의 없다. 나 혼자만의 착각인지 모르지만 많은 글쟁이들은 그런 경험에 익숙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나에게 생일이라고 무엇을 해 줄 때면 나는 너무 어색해 어쩔 줄을 모른다. 분명히 고맙지만 나도 모르게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다. 왜 이런 것을 했느냐고 화를 내기도 한다. 분명히 내 마음은 고맙다고 느끼지만 그런 표현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누나가 생일이라고 집에 다녀갔지만 혼자 사는 남자의 집에 와서 누나가 할 일은 무엇일까?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집안에 고장난 것들을 몇 가지 수리해 놓고 가는 누나를 생각하면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밀려온다. 누나도 아직 결혼을 안 했고 나도 마흔이 다 되도록 미혼이니 같이 늙어간다는 말이 이제 실감이 난다. 나이들며 누나는 나에게 엄마 대신 나를 돌봐 주는 보호자 같은 느낌이다. 일찍부터 객지로 떠난 누나는 내가 서울로 올라온 이후부터 자취방을 알아봐 주고 가끔 용돈을 주고 옷을 사 주고 내가 아플 땐 나를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데려간 적도 있다. 곰처럼 나는 아파도 참는다. 가끔 집에 들러 청소까지 해 주니 부모와 다르지 않다.
20대의 생일날, 그리고 30대의 생일날, 또 40대의 생일날,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산다면 얼마나 쓸쓸할까? 20대에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주변을 둘러보면 많은 사람들이 생일을 즐기고 있다. 태어난 것이 과연 행복한 일일까 질문해 본다. 그러나 나의 이런 질문은 너무 심각하고 쓸데없는 짓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맞는 말이다. 나는 늘 심각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한다.
생각해 보니 나는 늘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기쁨을 마음껏 누려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습관적이었던 것 같다. 나의 습관 때문에 내가 늘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스스로를 불태워 빛을 내뿜는 것들, 그것은 어둠이기 때문에 그 존재가 환하게 빛나는 것이다. 작은 난로가 추위 속에서 더욱 소중해지듯 불꽃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 그러므로 난로와 불꽃이 따듯하고 아름다워지기 위해선 추위와 어둠이 필요하다.
생일이 나에게 주는 선물은 추위뿐이라고 생각했다. 감각의 진폭을 풍부하게 느끼라고 눈송이를 공중에 뿌려놓는다. 그것을 황홀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이런 글을 쓰며 온갖 엄살을 부리며 만족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무엇에 만족할 것이 없으므로 자족할 도리밖에 없다. 가난한 자들에게 생일은 얼마나 무서운 형벌인가.
이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무런 선물이 없다. 방안과 씽크대, 옷걸이까지 여기저기 찾아 봐도 선물이 없다. 누나는 나에게 어떤 선물을 주고 갔을까. 나는 누나에게 문자를 보낸다.
“누나 선물 어디다 뒀어?”
몇 분이 지나자 간단한 답이 온다.
“냉동실 열어봐”
나는 냉동실 문을 열고 누나가 얼려 놓고 간 얼음덩어리를 본다. 그리고 짧은 메모를 본다.
“한 번에 먹을 만큼씩 봉지에 싸 놨으니까 먹을 때마다 냄비에 넣어서 데워 먹어라. 먹으면 설거지 바로 하고, 바퀴벌레 생긴다.”
나는 북극곰처럼 멍청히 서서 얼음덩어리를 본다. 미역국으로 만든 얼음덩어리. 눈물이 난다. 북극곰은 얼음덩어리를 타고 놀고 얼음덩어리 위에 올라앉자 잠을 잔다. 나는 미역국으로 만든 얼음덩어리 위에서 살아가는 북극곰인가. 내가 우는 것은 내 삶이 슬퍼서인가 누나의 삶이 슬퍼서인가.
북극에서 선물이 날아온 것처럼 기쁘고 감동적이다. 미역국으로 만든 얼음덩어리는 내가 삶을 살아가는 데 너무나 큰 힘을 준다. 아이들의 장난이 신비로운 것은 추위 때문이다. 불꽃처럼 환하게 타오르는 아이들. 빛나는 만큼 기쁨은 짧은 순간 소멸되겠지만 그 짧은 순간 때문에 오랫동안 나는 행복할 것이다. 선물을 받는 순간 나는 아이가 된다. 너무나 먼 나라에서 날아온 선물처럼 어색하고 신비한 얼음 덩어리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곰처럼 웃을 것이다. 한 아이의 웃는 얼굴이 오로라처럼 빛을 뿜으며 겨울마다 내 앞에 펼쳐진다.
김성규 시인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