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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인물 탐방] 김형민 PD 인터뷰


인터뷰 요청을 받고 그 동안 <화제의 인물탐방> 코너에 소개된 분들의 면면을 보고 “나는 급이 아니다”라며 손사레를 치는 김형민 PD를 막무가내로 찾아가 인터뷰를 한 이유는, 큰 한 방으로 세간의 이목을 끄는 인물들은 집중적으로 spot light를 받지만, 크게 한 방 터뜨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인물보다는 지속적으로 소소한 화제를 제공하는 인물도 화제의 인물이기는 마찬가지이고, 그가 SNS에서는 결코 무시 못 할 존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인터뷰/정리 : 김학웅 본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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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안녕하세요? 불쑥 찾아와서 죄송하고 바쁘신데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A. 네 반갑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급이 아닌데 이렇게 먼 길 오게 해 죄송합니다. 

Q. 대학에서는 역사를 전공하셨는데, 방송 PD가 되신 이유는요?
A. 사실 사학과라는 과는 오라는 데가 없어서 그렇지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과지요. 저희 과 동기들만 해도 그 업종과 직군이 매우 다양합니다. 방송에 있는 친구도 있고 IT에 있는 친구도 있고 주류 회사 이사도 있고 형형색색 다르죠. 90년대 초반 복학은 했는데 학교 분위기도 바뀌어 있고 분위기도 시들하고 당시 유행하던 고시 공부라도 해야 하나 했는데 친구 하나가 와서 어깨를 치더군요. “언론 공부 안 해 볼래?” 그래서 뭘 공부하면 되냐고 물었더니 ‘국어, 영어, 상식’이랍니다. 그거라면 해 볼 만하겠다 싶어 언론사 스터디를 시작하게 됐고 “앞으로는 영상 시대다”라는 구호에 편승하여 신문은 기자, 방송은 PD를 지망하여 언론사의 문을 두드리다가 1995년 1월에 SBS 프로덕션에 PD로 입사하면서 방송 인생을 시작하게 됐죠. 그때 다른 신문사 하나도 동시에 합격했었는데 못 믿으시겠지만 갈등 끝에 동전을 던져서 방송 일을 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500원짜리를 던졌는데 학이 나오더라고요. 

Q. 제법 오랫동안 <긴급출동 SOS>을 제작하셨는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건 너무 많은데... 워낙 사회의 밑바닥을 훑는 프로그램이어서 가슴 아프고 기막히고 분통 터지는 일이 하나 둘이 아니었지요. 주변에서 “연출 아니냐?”고 물을 정도로 끔찍하고 기구한 사연이 많았거든요. 그 중에 하나 이런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언젠가 저는 한 매 맞는 ‘아내’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남편은 폭행의 잔인함과 무지막지함으로 따져서는 <긴급출동 SOS> 1년 역사에서 1, 2위를 놓치지 않을 걸물이었습니다. 의처증의 소유자로 기억나는데, 술에 취하거나 정신을 놓지 않은 상태에서도 지극히 태연하게 아내를 짓밟는 폭력신공의 소유자였지요.
아내가 가장 심하게 폭행당했던 것은 내밀한 집안이 아니라 대로변이라고 했습니다. 이혼을 요구하자 법원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법원 앞 지하철역에서 마주친 직후 주먹이 날아들기 시작했고 칼바람 휘몰아치는 길거리에서 아내는 차가운 아스팔트에 뺨을 댄 채 자근자근 밟혔습니다.
“무서웠어요. 집안에서 맞을 때보다 더 무서워. 왜 그러냐 하면 난 거리에서 그렇게 맞을 줄은 몰랐거든. 누가 와서 도와 주거나 경찰이 곧 오거나 그럴 줄 알았죠. 그런데 그 기대가 무너지는 거야. 사람들이 말려도 남 일에 참견 말라고 악을 쓰면 무서워서 가 버리고, 이년이 제비한테 홀려서 재산 다 말아먹은 년이고 새끼 학비까지 제비에게 갖다 바친 년이라고 소리소리지르는데, 거짓말같이 사람들이 끌끌 혀 차고 가는 거야. 뭐라고 말도 안 나와요 나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이게 다지...”
멀리 법원이 보이는 길거리에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죽을 것 같은’ 공포에 빠진 아내에게 구원의 손길이 닥친 것은 정신없이 맞기 시작한 20분쯤 지나서였다고 했습니다. 한 당찬 아가씨가 남편의 폭력을 가로막고 나선 겁니다.
“신랑 앞에 딱 서서는 때리지 말라고, 한 대만 더 때리면 신고할 거라고 하면서 핸드폰을 들이밀어 남편 눈 앞에... 112가 찍혀 있었다나 봐요. 그 핸드폰 딱 쥐고 그때부터 우리 둘을 따라다니더라고. 남편이 골목으로 들어가니까 골목까지 들어와.”
이 얘기를 들으면서 저는 한 여장부가 의기 철철 넘쳐 흐르는 눈매를 빛내며 핸드폰을 높이 치켜든 채 남편을 위압하는 멋진 장면을 머리 속에서 편집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의 험악한 주먹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코웃음을 치면서 ‘한 대 쳐 봐라 응?’ 하면서 차가운 미소를 머금는 대찬 처녀의 부르쥔 주먹과, 그녀의 등장에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남편의 얼굴을 교차 편집하다 보니 심각한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도 흐뭇한 감탄사를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허허 참 대찬 아가씨였네요.”라고 했더니 아주머니는 그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대찬 아가씨가 아니었어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의아한 눈빛을 던지자 아주머니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말을 이었습니다.
“그 아가씨 말리는 내내 파들파들 떨고 있었어요. 우리 신랑이 주먹을 쥐고 때릴 듯 하면 주저앉아서 ‘엄마야~~’ 그랬다니까. 내 보기에도 나만큼 겁먹었던 거 같아. 핸드폰도 두 손으로 쥐고 있는데 바들바들 떠는 게 보였어요. 그런데도 계속 뒤따라오는 거예요. 이빨 딱딱 부딪치면서 ‘아저씨 때리지 마세요. 신고할 거예요. 신고할 거예요’ 하면서...”
처음에는 남편은 아가씨의 만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아가씨가 112를 기어코 누르고 예의 겁먹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위치를 알려 주는 지경에 이르자 아내에 대한 폭력을 멈추었고, 지하철역까지 따라붙으며 아줌마를 놔 주라고, 안 그러면 신고한다면서 ‘이빨을 딱딱 부딪쳤던’ 가냘픈 처녀와 마누라를 놔 둔 채 자리를 떠 버렸다고 합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이름도 못 물어 봤어요. 그런데 다시 만나면 막 웃으면서 물어볼 것 같아요. 도대체 무슨 용기로 날 구해 줬냐고. 우리 신랑이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이 야리야리한 아가씨가 말이야... 그런데 날이 지날수록 고마워져요. 힘도 없고, 겁도 많은 아가씨잖아요. 덩치 좋고 젊어 팔팔한 청년들도 많이 지나갔거든. 그런데 그 아가씨가 내 목숨을 구해 준 거예요. 오버한다고? 아니에요. 나 그날 자살했을지도 몰라요. 길거리에서 그렇게 비참한 꼴 보이고 살아갈 기력 없었을 것 같아.”
지금도 아주머니는 버스를 타거나 길을 가면서 그때 그 아가씨와 체격과 인상이 비슷한 이들을 보면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고 두 번 세 번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그녀를 만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라지요. 그리고 그 이후로도 남편으로부터 비롯되는 죽음 같은 공포를 몇 번 맛보았지만 그때마다 아가씨의 떨리던 목소리와 손을 생각하며 저항을 시도한다고 했습니다(남편은 이혼 뒤로도 찾아와서 스토킹을 했고, 그게 우리와 만난 이유였죠). 그리고 언젠가 자신도 술 퍼먹고 마누라를 북어 취급하던 한 남자의 앞에 뛰어든 적이 있노라며 웃었지요.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를, 가냘프기 짝이 없고 대차기보다는 유약함에 가까운 아가씨가 드러내 준 용기가 한 사람을 바꾸었던 겁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우주를 구한 것이다’라는 격언에 진실성이 담겨 있다면, 그녀는 우주를 구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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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동안 몇 권의 책을 내셨고, 딴지일보와 시사인에도 기고를 하셨거나 현재도 하고 계신데, 원고를 쓰는 기준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A. 기준이랄 것까지는 없고요. 일단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합니다. 곰곰이 생각하고 곱씹어 고민해서 얘기한다기보다는 좀 즉자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해 버리고 쓰고 싶은 포스팅을 걸어 버리는 스타일이죠. 물론 시사인에 연재하는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는 딸이 가상의 청자(廳者)인 만큼, 그리고 시사잡지에 싣는 만큼 좀 점잖아지려고 노력하지만 SNS에서는 보다 더 솔직하고 즉자적이 돼서 간혹 머리 긁으며 지우거나 혼자보기로 돌리는 일도 있습니다. 역사 이야기는 제가 좋아하는 분야의 이야기고 지금은 중단했지만 그날그날의 역사를 찾아 적는 <산하의 오역>은 제가 가진 가장 고급진 취미이기도 했었습니다. 

Q. 대학 시절 PD계열의 운동권이었으면 유물론자였을텐데, 지금은 개신교 집사님이 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요?
A. 저는 운동권이라고 하기엔 좀 창피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운동하지도 않았고요. 더욱이 이론과 학습에 투철해야 했던 PD로는 낙제였습니다. 세미나 하자면 도망다니면서 술이나 찾아먹던 자가 어찌 운동권을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제 신앙은 저희 집이 제 아들 딸까지로 하면 5대째 기독교인이라는 데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돈독하고 독실한가 물으면 전혀 그렇지 않으며 다니던 교회를 땡땡이치며 안 나간 게 1년 반째라고 쑥스럽게 답변해야 합니다. 집사가 된 것도 별안간 목사님이 전화 주셔서 “올해는 하는 겁니다?” 하셔서 “네? 네...” 해 버린 것의 결과일 뿐입니다. 하지만 저는 하느님을 믿고 예수의 가르침에 머리 숙이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래야 제가 편하거든요. 붙들 수 있고 떨쳐 물을 수도 있고 그냥 스스로룰 던져 버릴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요. 

Q. 결혼식 주례는 통일운동에 열심이셨던 홍근수 목사님이 서신 걸로 알고 있는데, 김 PD님이 PD계열이었는데 NL계열의 홍근수 목사님께 부탁한 이유는요?
A. 제가 ‘대학 때 공부를 참 안 했구나’ 하는 걸 새삼 깨달은 건 결혼할 무렵이었습니다. 주례를 부탁해야 하는데 회사 사장님께 부탁하긴 그렇고 이른바 ‘은사’님께 주례를 청하자니 기억나는 은사가 한 분도 안 계신 겁니다. 주례를 부탁하러 간다면 아마 백이면 백 “자네가 사학과였나?” 하고 눈을 동그랗게들 뜨실 게 뻔했으니 난감할밖에요. 그렇다고 아내에게 주례 선생님을 모시고 오라고 하기는 왠지 체면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때 아내가 별 고민 다한다는 듯 한마디 했지요. “목사님한테 부탁해.” 홍근수 목사님 계실 때였죠. 
예나 지금이나 저는 향린교회의 ‘유령’입니다. 낯을 가리긴 해도 익숙해지면 어디에든 스스럼없이 스며드는 성격입니다만 이상하게 어려서부터 교회에는 뿌리를 잘 내리지 못했습니다. 95년 연애할 때부터 향린교회를 기웃거리기 시작했으니 결혼할 때는 2년 정도 다닌 처지였지만 이른바 정회원도 아니었고 목사님도 막상 찾아가 뵈면 “우리 교회 신도셨어요?” 하실 것이 뻔했습니다. 처음에는 고개를 저었지만 대안이 없지 않으냐는 아내의 채근에 당시 부목사님이셨던 이혜진 목사님께 언질을 드리고 나름 정성껏 쓴 편지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은 정회원이 아닌 경우 주례를 하지 않으세요.” 그러면 그렇지 쩝쩝 입맛을 다시는데 이혜진 목사님의 말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정회원 된다는 약속을 하시면 주례를 서 주시겠답니다.” 뭐 이런 약속이야 1만 번이라도 하지요. 이런 곡절을 거쳐서 홍근수 목사님은 제 주례 선생님이 되셨습니다. 

Q. 가족분 중에 법조인이 있다고 들었는데, 최근 사법시험 존치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A. 잘 모르는 자의 의견임을 전제로 하고, 저는 사법시험이 존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수를 줄일지언정 통로는 남겨 두는 게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제 처남의 경우 근 7년의 공부 끝에 합격을 했습니다만 로스쿨에만 기회가 국한돼 있다면 아마도 공부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물론 그 7년 동안 들인 시간과 비용 또한 싼 것은 아닙니다. 로스쿨에 가서 장학금 혜택을 받으며 공부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법조인의 등용문이 오로지 로스쿨이라면 제 처남은 아마 법조삼륜의 바퀴살이 되기 어려웠을 겁니다. 

Q. 최근 중앙일보 권석천 논설위원이 페이스북에 김 PD님을 언급하며 “페북 입문 후 김형민 PD님 글을 읽으며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역사와 사회를 보는 시각, 뚜렷한 방향감각 속에서도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 자세를 배우곤 합니다. 오늘 PD님 글은 아이돌로부터 팬레터를 받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저의 뭉툭하고 어설픈 글들을 따뜻한 시선과 (그야말로) 송곳 같은 언어로 짚어 주시는 글을 보면서 무한한 민망함과 함께 제가 그렇게 잘못 살지는 않았구나, 느끼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술은 잘 못하지만 PD님과 비틀거릴 때까지 만취해 보겠습니다”라는 포스팅을 올렸는데, <정의를 부탁해>와 관련해서 뭐라고 평하였나요?
A.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최근 화제가 된 만화 <송곳> 같은 책이다. 역시 내가 팬을 자처하는 만화가 최규석씨의 대사를 슬쩍하면 “다음 한 발이 철벽일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속에서도 제 스스로 쓰고 싶어 미치는 글줄을 어쩌지 못해서 철판에다 손가락으로라도 긁어서 새기고야 마는 그런 송곳 같은 글”이라고나 할까. 
이 책에는 그리 아름답지는 않으나 버릴 데라고는 하나도 없고 수려하지는 않으나 못생긴 데는 한군데도 없는 근육질의 칼럼들로 가득하다. 사건은 기자를 만든다. 동시에 기자는 사건을 사연으로 만든다. 누구의 눈에나 발견되고 흠칫 놀라긴 해도 이내 외면할 수 있는 사건에서 자신만의 시각을 꽂아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칼럼으로 만들고 그 속에 사람들의 울컥하는 마음까지 가둬 버린다면 기자로서 그 이상 무엇이 있겠는가. 이 책의 한 편 한 편이 다 그렇다. 글에서 호출되는 모든 인용과 위인들과 사건들과 영화와 문학들은 칼럼 안에서 주연이 되고 조연이 되고 소품이 되고 의상이 되어 짧은 단편 영화를 본 느낌을 가지게 만드는 것이다. 글을 읽으며 분석하고 상념에 잠긴다기보다는 짤막한 영화 속에 몰입하여 아이고 한탄하기도 하고 찡 눈가에 어린 물기 닦아 내리기 위해 손을 갖다대는 느낌. 그것이 이 책을 보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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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끝으로 하시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요?
A. 동어반복이지만 급이 안 되는 이에게 관심 가져 주시고 궁금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다른 할 말이야 없지만 오래 전 돌아가셨지만 대학 시절 기억나는 최고의 명강의의 주인공이었던 정운영 교수님의 말씀을 인용해 볼까 합니다. 25년쯤 전, 어느 날 우연찮게 강의 중 러시아 혁명 얘기가 나왔고 똑똑한 학생들이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대학 내내 열등감에 시달릴 만큼 영민한 사람들이 주위에 참 많았죠. 그 학생들의 질문에 일일이 답하던 장신의 교수님이 천천히 강단을 오가면서 한 마디를 했습니다. “여러분.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섣불리 실망하지도 마세요. 세상은 그러기엔 너무 큽니다.” 그의 모든 명강의는 다 까먹었지만 그 말만큼은 지금도 기억하고, 내 블로그의 소개글로 써먹고 있습니다. 요즘 헬조선이다 뭐다 나라의 미래가 온통 잿빛이라며 한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 또한 그 중 하나일 것이고요. 그 근심걱정과 열패감이 치밀 때 저는 가끔 교수님의 한마디를 읊조리곤 합니다. “기대하지도 실망하지도 말자. 세상은 그러기엔 너무 크다.그렇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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