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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음] 김밥천국
김밥천국 

연인이 밥을 먹네 
헝클어진 머리통을 맞대고 늦은 저녁을 먹네 
주방 아줌마 구함 벽보에서 한걸음 물러나 정수기가 놓인 맨 구석 자리에 앉아 
푸한 김밥 두어줄 앞에 놓고 소꿉을 살 듯 
여자가 콧물을 훌쩍이자 그 앞으로 쥐고 있던 냅킨 조각을 포개어 내미는
남자의 부르튼 손이 여자의 붉어진 얼굴이 
가만가만 허기를 달래네 
때마침 식당 앞 정류장에 당도한 파주행 막차
연인은 김밥처럼 동그란 눈으로 젓가락질을 멈추네
12월의 매서운 바람이 잠복 중인 바깥
버스 뒤뚱한 꽁무니를 넋 없이 훔쳐보다 이내 버스가 떠나자 
그제야 혓바닥 위에 올려둔 김과 밥의 부스러기를 내어 재차 오물거리네 
흰머리가 희끗한 주인은 싸다 만 김밥 옆에서 설핏 풋잠에 들고 
옆구리가 미어지도록
연인은 밥을 먹네 김밥을 먹네 


촌스러운 주황색 간판, 한식·양식·정식·분식이 내달리듯 열거된 빽빽한 메뉴판, 좁고 낮은 테이블, 칠이 벗겨진 플라스틱 그릇과 그 속에 체념한 듯 담긴 미지근한 장국……. 내가 아는 김밥천국이란 으레 이런 곳이다. 김밥이라는 말 옆에 누가 어떤 의도로 천국이라는 말을 세워 두었는지는 모르나, 이 추레한 곳은 사실상 천국과는 꽤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이런 천국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있다 해도 김밥 옆에 있는 천국이라면 그 얼마나 쓸쓸한 곳인가. 단지 김밥만으로 천국일 수 있다는 의미일 테니. 그런 곳이라면 굳이 가 눈으로 보지 않아도 내막을 훤히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쯤에서 확실히 말해 두지만, 나는 김밥천국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주머니 사정이 뻔한 사회 초년병 시절에도 동료들이 이곳 천국 아닌 천국으로 발길을 옮길 때면 나도 모르게 눈을 흘기곤 했다. 문제는 김밥천국이 아니라 나인 걸 알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그곳에서의 식사가 아니라, 한 끼의 식사를 또 그렇게 ‘대충’ 때워야만 하는 내 생활이면서도. 그런 것에 너무 쉽게 길들여지고 마는 궁상스러운 기질이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밥천국과 완전히 결별할 수는 없었다. 지금도 나는 이따금 그곳으로 향하곤 한다. 마치 서랍장에서 오래된, 그래서 가장 내 것인 옷을 몰래 꺼내 입듯. 김밥천국의 그 가볍고도 육중한 유리문을 밀 때는 주로 혼자 밥을 먹을 때다. 어쩌다 밥때를 놓치고 식당가 이곳저곳을 기웃거릴 때, 마땅히 혼자 들어가 앉을 만한 곳이 없을 때, 허기는 불대로 불어 문득 서러운 마음까지 들려 할 때, 그럴 때의 김밥천국은 어쩐지 제법 따스하고 정취 어린 공간이 된다. 마음 편히 치대고 앉았다 가도 좋을 곳.

언젠가, 야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괜스레 휑한 마음을 달래려 대로변의 작은 김밥천국에 든 적이 있다. 야채김밥 한 줄을 시켜 놓고 천천히 그것을 씹다 보면, 따라 나오는 장국을 후후 불다 보면 평상시에는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기도 한다. 이를테면, 개수대에 쌓여 널브러진 물컵이며, 귀퉁이가 너절한 ‘주방 아줌마 구함’ 벽보며, 혼자 낮게 읊조리는 낡은 TV며. 그런 것들 틈에서 삶이라는 김밥을 말다 지쳐 버린 한 여인이며, 여인의 구부정한 등이며, 밥풀이 묻은 손목이며, 한구석에서 조용조용 김밥을 씹고 있는 연인이며, 가난을 빼닮은 연인의 얼굴이며, 부르튼 손이며, 붉어진 뺨이며, 그들이 한 자세로 이따금씩 바라보는 차디찬 바깥 풍경이며, 놓쳐버린 버스며…… 하는 것들. 그런 풍경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풍경의 일부가 되어 가는 것이다. 

고요한 밤의 김밥천국. 그곳에 앉아 나는 잠시 엉뚱한 생각에 빠져 보기도 한다. 24시간 문을 여는 이 작은 밥집에서라면 가난한 연인은 막차를 놓쳐도 괜찮겠다, 하는. 옆구리가 미어지도록, 미어지도록 김밥을 먹다 보면 어김없이 아침은 올 것이고, 그러면 또 연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그 아침 속으로 걸어나갈 테니까. 막 풋잠에서 깬 주인 여자는 다시 분주히 김밥을 말아 낼 테니까. 나는 그렇게 잠시 허기를 잊을 테니까. 여기가 비록 저 높은 천국은 아니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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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란 시인
2009년 『문학수첩』으로 등단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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