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음을 끌고 가는 건
가보지 못한 그 많은 길들이 아니던가.
-장석주
나는 의사에서 헬스트레이너로 직업을 바꿨다. 그 이유는 순전히 열 받아서다.
2014년 9월 29일, 직장을 잃었다. 땅거미가 져서 어둑어둑해진 퇴근 무렵, 의료원 측에서 갑작스러운 면직통보를 해왔기 때문이다. 호스피스 의사를 하기 위해서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된 나에게는 파면과도 같은 것이었다. 면직 하루 전날, 의료과실 등으로 병동을 떠난 사람이 허위 사실을 과대 포장하여 인터넷에 유포했고, 부임 초부터 관계가 껄끄러웠던 D의료원 A원장은 그 내용을 빌미로 나를 호스피스 센터장에서 면직했다. 장성한 남자 3명이 갑자기 진료실로 들어왔다. 그들은 왕의 특명을 받고 사약(死藥)을 가져 온 것처럼 두터운 서류보관함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큰소리로 또박또박 읽었다. 그리고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는 면직서류를 책상에 던져 놓고 총총히 사라졌다. 이 일이 계기가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D의료원은 예정에 없던 시 특별감사를 받았다. 나는 난생 처음 정신병원에 3주간 입원을 했고, A원장은 35건의 위법·부당사항과 44명의 문책을 요구하는 감사 결과 발표에 돌연히 사표를 던졌다.
그날 이후 나는 의사생활을 그만뒀고, 1년 후 보디빌더 2급 생활스포츠지도사가 됐다. 몸과 마음의 상처를 곰삭히기 위해 가볍게 시작한 운동이었지만, 지금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나는 운동이나 스포츠 관람 같은 것을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다. 몸으로 하는 것만큼은 누구보다 형편없다는 것을 잘 아는 남편은 내가 ‘스포츠지도사 자격증’에 도전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모두 3번의 시험을 쳤다. 적당히 부풀어 오른 근육질의 젊은 수험생들에 비해 나는 형편없이 초라했다. 흰 의사가운에 청진기를 목에 걸고 자신감에 차 있던 나는 짧은 운동팬츠와 탑을 입고는 기가 푹 죽었다.
‘아! 반평생 동안 나의 몸에게 얼마나 충실히 대하고 있었던 것일까?’ 호스피스 병동에서 근무할 때와는 정반대의 질문이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육신이란 여행가방 안에 깃들었던 내 영혼이 숨을 곳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내는 순간이다.”이라고 한 소설가 박완서 씨의 말이 나의 좌우명이었다. 삶의 끝자락이 머무는 호스피스 병동은 영혼의 여행가방을 열어보는 마지막 공항이라고도 여겼다. 그렇게 8년 동안을 죽음이라는 것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영혼이라는 것을 담는 몸 만드는 일을 걱정하고 있다니.
본의 아니게 죽음의 의사에서 삶으로 돌아오면서 ‘삶과 죽음’의 차이를 곰곰이 생각한다. 나는 의사이지만 심장이 규칙적으로 콩닥콩닥 뛰고 있는 것을 ‘삶’이라 하고, 심장이라는 근육에서 전류가 흐르지 않아서 심전도가 일직선이 되는 것을 ‘죽음’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삶과 죽음은 겉으로 반복되는 일상의 연속인 점에서 본다면 다른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은 적어도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살아 있지만 죽어 있는 것과 비슷한 삶이 있는가 하면, 죽어 가면서도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죽음을 많이 보았다. 이것이 51세의 빈약한 몸으로 헬스트레이너에 도전한 원동력이 되었다.
김여환 가정의학과 전문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