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소가 당신을 진정한 변호사로 거듭나게 한다.
‘나의 소송이야기’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바로 떠오른 사건은 2008년도의 엄청난 패소사건이었다. 꽤나 오래되었지만 나로서는 정말 잊을 수 없는 사건이고, 변호사 후배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경험이다. ‘조합설립무효소송’에서의 패소사건인데, 이 사건 이후 약 3년에 걸친 눈물겨운 뒷수습과정에서 나는 변호사로서 엄청난 내공을 쌓게 되었다. 승소보다는 패소가 변호사의 맷집을 강하게 만든다. 연이은 승소에서는 배울 게 별로 없다.
착공 직전에 조합설립무효판결을 받다.
나는 서울 중구 순화동 재개발조합의 고문변호사로서 그 조합의 거의 모든 소송을 담당하였는데 명도소송과 집행을 마무리하고 건물철거까지 끝낸 후 착공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조합원이 민사소송으로 제기한 조합설립무효소송에서 ‘피고조합의 설립은 무효’라는 판결이 2008. 3. 20. 선고되었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07가합73821). 이로써 조합의 사업은 중단되고 시공자의 조합에 대한 자금지원, 조합장과 이사들의 직무집행 등도 모두 정지되고 다른 변호사가 직무대행자로 선임되었다. 철거를 끝낸 현장에서 풀만 무성히 자랐다.
대법원 판례변경을 위한 진통과정이었다.
내가 실수한 것이 아닌가 자책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패소사태가 전국적으로 유행하게 되었고 그러한 흐름에서 내가 거의 첫매(정확히는 세 번째)를 맞은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내가 패전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조합장과 임원들은 나를 바보 취급했고 항소심은 다른 대형로펌에 맡겼다. 그 외에도 무수한 소송이 쏟아졌는데 1억 원 넘게 밀려 있는 수임료를 받기 위해서라도 나는 추가소송들을 한없이 외상으로 수행해야 했다.
그러기를 3년, 마침내 조합이 살아났다. 대법원에서 이 사건은 행정사건으로 취급해야 한다면서 행정법원으로 이송하였고(대법원 2009. 9. 24. 선고 2008다60568판결 등), 행정사건에서는 조합이 연이어 승소하여 결국 다시 대법원까지 가서 최종승소하였다. 행정소송 제1심에서 승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사도급계약효력정지가처분은 아직 항고심에서 해제되지 않고 있었다. 가처분이 풀리고 난 이후에도 조합은 여기저기 돈 줄 곳이 많다고 하면서 내 수임료는 안 주었다. 변호사보수의 3년 단기소멸시효에 완성되기 직전 나는 의뢰인 조합을 상대로 소송을 하였다. 몇 달 뒤 수임료가 나왔다. 강제로 저축한 돈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변호사, 피고석에 서다
그 과정에서의 일은 말로 다 못 할 정도이다. 조합의 임원과 컨설팅업체의 직원이 이러한 스트레스가 추가적인 원인이 되어 사망하였고, 세입자로서 강경하게 투쟁하던 분이 용산4구역에서 원정을 가서 투쟁하다가 남일당 건물에서 사망하였다.
또한 조합원 건물명도과정에서 반출된 물품이 법원 물품 보관소에서 무단 폐기되는 일이 있었다. 패소 이후 관계가 소원해진 조합장이 평소와 달리 나에게 명시적인 자문을 받지 않고 일을 하다가 이렇게 되었다. 자신의 물건이 무단폐기된 것을 안 조합원들이 조합 측에서 일을 하던 나에게 앙심을 품고, 나와 사무장, 조합장, 조합을 상대로 2억 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나는 나를 위한 준비서면을 쓰고 변론기일에 피고석에 섰다. 평소 같으면 ‘피고 대리인 김향훈 변호사님?’이라고 했을 재판장이 그날은 ‘피고 김향훈 씨?’라고 물었다. 손해배상 사건은 서울고등법원에서 4천 6백만 원으로 합의되었고 그 중 절반인 2천 3백만 원을 내가 물어내었다.
엄청난 패소를 겪고, 모멸감을 느끼고, 뒷수습을 하고, 수임료도 못 받고, 게다가 개인적으로 소송까지 당하고 나니 세상에 못 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나게 맷집이 강해진 느낌이었다. 재개발 관련 법리와 인간군상의 행태는 이 때 모두 터득했다.
대법원 판례변경의 정황
위와 같은 사태는 대법원 1998. 6. 26. 선고 98다15996 판결이 대법원 2009. 9. 24. 선고 2008다60568로 변경되는 과정에서 생긴 진통이었다. 98다15996 판결은 “재건축결의 중 비용분담에 관한 사항은 중요하고 본질적인 부분으로서, 재건축의 실행단계에서 다시 비용분담에 관한 합의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그 ‘분담액’ 또는 ‘산출기준’을 정하여야 하고 이를 정하지 아니한 재건축결의는 무효”라고 판시하였다.
그런데 집합건물법상 ‘재건축결의’는 재건축에 대한 단일하고 유일한 결의이므로 구체성을 띠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고 가능한 것이지만, 도시정비법상 사업진행은 조합설립→사업시행인가→관리처분계획수립이라는 3단계로 진행되기에 그 첫 단계인 조합설립단계에서는 사업계획이 절대로 구체적일 수 없다. 이러한 점을 아무리 설명해도 전국의 하급심법원들은 막연히 구시대의 판례인 98다15996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여 이미 철거까지 마친 재건축조합의 사업을 전면 중단시키는 판결들을 연이어 내놓았다.
결국 대법원은 대법원 2009. 9. 24. 선고 2008다60568 판결을 통하여 “조합설립인가처분은 ‘보충행위’가 아니라 행정주체(공법인)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는 일종의 ‘설권적 처분’이며, 인가처분 이외에 별도로 조합설립결의 부분만을 따로 떼어내어 그 효력 유무를 다투는 확인의 소를 제기하는 것은 부적절한데, 이 소송은 조합설립인가처분에 대한 항고소송으로 변경될 수 있어 관할법원인 행정법원으로 이송한다”고 판시하였다. 행정소송은 제소기간 90일이 경과하여 제기되면 하자의 중대명백성을 요구하기에 원고청구가 기각되기 쉬웠다.
이 사건 이후 나는 재판 흐름의 미묘한 변동이 얼마나 큰 소용돌이를 만드는지 알게 되었고 기존의 대법원 판례라는 것은 맹신할 게 못 되며, 새로운 현상을 맞이한 변호사는 새로운 법리를 적극 개발할 책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김향훈 변호사
사법시험 제43회(연수원 33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