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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음] 느린 슬픔

 느린 슬픔

이진희

추락하는 몸을
목련나무 가지들이 차례대로 받아주었다지

라일락 향기 또한 어리고 보드라운 너를 휘감아
네가 더욱 무사했으리라는 상상, 다행이다

주홍빛이 덧대진 푸른 하늘과 흰 구름
깜박 다른 생의 부숭한 화단에 오목하게 등 대고 누웠다가
별다른 상처 없이 툭툭 털고 일어선 너

셔터부터 내려지는 감정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
찻집 유리문 너머 지나치는 아무 행인들 속에
네가 있고 내가 있고 그렇다 우리들이

크게 넘어져도 곧장 울지 않는
나중도 아주 나중 혼자일 때에야 헤아려보는 아픔
하나같이 우리는 넘치거나 모자라는 존재

아끼는 물건이 저마다 다르듯
슬픔의 차가운 물결에 뒤늦게 울컥 작은 손을 담그고
여러 겹 어두운 커튼을 걷지 않는 너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믿는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사는 내내 탐구해야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가 아닐까 헤아려 봅니다. 하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제대로 알려고 하는 것, 다른 하나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가능한 한 이해하고자 하는 것.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고자 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겠으나 다른 사람을 가능한 한 이해하는 일은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지 않을까요. 이해한다는 것이 다만 타인을 인정하는 상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상황까지를 포함한다면 말이지요. 

무언가를, 어떤 일을, 어떤 대상이나 상대를 완전히 이해하는 일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사랑할 수 있을 듯합니다. 모든 사랑이 그렇지 않을까요? 사랑은 제대로 모르는 상태라야만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상대에 대해 알게 되면서 점차 실망과 균열과 다툼이 생기고 끝내 이별을 하게 되는 듯합니다. 그래서 불완전함을 깨달은 이후에도 사랑하고, 불균형함을 안 이후에도 받아들이는 일은 어렵지만 소중합니다. 

뒤늦게 밀려오는 슬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크나큰 상처였는데 그 정도 크기의 상처인 줄 모르고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치료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상처인 줄 알았다 해도 치료할 방법을 몰랐을지도 모르지요. ‘어떻게 그런 일이’라고 하는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는 세상입니다. 치료하지 못한 어떤 상처는 두고두고 덧납니다. 마음에 난 상처는 묵힐수록 크게 덧나고요. 

심해의 물고기가 바다 깊은 곳에서 물이라는 물질의 존재를 잊고 살 듯, 넘치는 공기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절박했을 몇 분 동안의 공기를 대체로 잊고 살아갑니다. 도처에 공기가 가득하고 해가 눈부시게 내리쬐고 꽃들이 피어 있는 계절입니다만 도처에는 또한 갈무리되지 못한 무수한 슬픔과 고통이 널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로 어떤 감정인지 알지 못해서 공감하지 못하는 슬픔과 고통이 있겠지만,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이미 너무 잘 알아서 스스로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차단되는 감정이 있습니다. 

말이든 무엇으로든 표출하기 어려울 정도로 버거운, 그래서 당장에 처리되지 않는 감정. 그러나 그래서 오히려 내면 깊이 아로새겨지는 슬픔과 고통을 조용히, 무감각한 사람처럼 안고 살아가다가 혼자 문득 크게 아파하는 친구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둠이 내린 번화가의 한 찻집에서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런 얘기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알아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해내는 평범한 행동이 어떤 이에게는 참으로 오래 많은 힘을 들여야만 마침내 해낼 수 있는 난제일 수 있다는 것. 비명과 침묵은 때로 같은 낱말이라는 것.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사람치고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것. 어느 날의 저녁은 그렇게 깊어 갔습니다. 돌연한 추락에서 신기할 만큼 무사했던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는 동안, 참으로 다행이다 싶었던, 그런 다행이 모두에게 아주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싶었던, 아니 났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던 저녁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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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희 시인
2006 《문학수첩》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실비아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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