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난과 비판 사이
다양한 정보를 손쉽게 검색할 수 있는 요즘, 쉽고 간단한 사건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치열한 공방과 법리 해석까지 어느 하나 쉽지 않은 사건들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간혹 상대방 대리인의 날이 선 표현을 접하기도 합니다. 내 의뢰인을 향한 -결국 나를 향한- 인격적 비난에 가까운 표현을 보며,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판결에 영향을 미칠 것 같지는 않아서, 또는 대부분 나보다 높은 연배의 변호사님이라서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날, "변호사님, 상대방은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대리인도 어쩌면 변호사라는 사람이 저렇게 나쁜 사람과 한통속이 되어 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승패는 관계없습니다. 저 나쁜 사람들한테 제 억울한 마음을 꼭 서면에 담아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의뢰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의뢰인이 신신당부하는 내용을 서면에 담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아! 내가 받은 서면이 이렇게 탄생할 수도 있었겠구나’라고 생각해 봅니다.
#2 냉정과 열정 사이 Part 1.
처음 소송을 시작하려고 할 때, 유난히 격한 감정의 의뢰인을 간혹 만납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얼마가 들더라도, 상대방에게는 지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그 뜻을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웁니다. 어느 날 의뢰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습니다. "변호사님, 제가 잘 하고 있는 걸까요? 이길 수 있을까요? 변호사님이 제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실 건지 솔직히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분명히 가능성이 있는 소송이지만, 위험성도 있습니다. 저라면 냉정하게 어느 선에서 합의점을 찾을 것 같습니다."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이틀 뒤, 의뢰인은 전화로 합의로 잘 종결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자신이 생각하는 '마지노선'을 이야기합니다.
문득 상대방 대리인이 지금까지 점잖은 서면과 신사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는 점을 기억합니다. 다행히 '마지노선'보다는 나은 수준에서 합의로 종결되고, 저는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3 변론과 변명 사이
특별히 더 어려운 사건들이 있습니다. 내가 당사자라도 억울할 것 같지만 아무리 찾아도 증거가 부족한 사건, 시간을 들여 고민을 해도 답이 잘 보이지 않는 사건. 하필 그런 사건들은 비슷한 날짜에 기일이 몰려 있습니다.
시간에 쫓기며 열심히 기일 준비를 합니다. 배경 설명과 함께 다음 기일의 입증계획을 밝히는 나의 목소리는, 법대 한가운데에서 내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분의 의아한 표정 앞에 왠지 자신감이 없는 것처럼 들립니다.
억울하기 그지없는 이 사건이 그분에게 한낱 평범한 수백 개 중의 하나의 사건이 아니길 바라며 다음 기일을 준비하지만, 야속하게도 다음 기일은 왠지 더 금방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4 냉정과 열정 사이 Part 2.
“의뢰인에게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하지 말라.”
연수원 교수님께서 술자리에서 해 주셨던 그 말을 잊을 만큼, 사건에 지나치게 감정이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왠지 이 의뢰인은 정말 불쌍하고, 이 사건은 꼭 이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럴 때는 기일이 다가올수록 잠이 오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올까봐 더욱 초조하기도 합니다.
어느 날 잠들기 전에, 내가 마음 속에서 사건의 경중을 멋대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다음 날 맡고 있는 사건 하나하나를 다시 살펴보며,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떠올립니다.
#5 이상과 현실 사이
법조계가 예전보다 어렵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립니다. 성실히 일하고 있는 동료들의 사기를 꺾는 부끄러운 소식도 자꾸 들립니다. 선배들이 하지 못했던 일을 우리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격려, 그리고 해야만 한다는 조언도 듣습니다.
동기, 가까운 선후배 중에 주중에 야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미래-생계 그리고 장래-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변호사님들은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정의와 공익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분들이 이제야 정의와 공익을 말하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동기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우리가 현실을 뛰어 넘어 이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빨리 다가오기만을 함께 희망해 보기도 합니다.
최낙균 변호사
사법시험 제54회(연수원 44기)
법무법인 민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