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법칙이건 개연성이건 간에 기필코 벌어지는 일들을 운명(運命)이라고 부른다. 민족의 중대사에도 그렇고 누군가의 인생에도 그렇다. 이미 굴레에 들어와 있건만 쉽게 그 굴레의 외연을 발견하기 어렵다. 어느덧 굴레는 계속 삶을 움켜쥐고 있다. 음악에도 “운명”이라 불리는 곡이 있다.
베에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2.17. ~ 1827.03.26.)의 교향곡 제5번(작품번호 제67번, C단조)은 “운명(運命)”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 어떤 이는 첫 동기에서 “다다다~다아아(DADADA DAAA)” 부분을 “운명이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라고 멋지게 표현했다. 학창시절부터 누누이 들었던 곡이겠지만, 클래식 음악(Classical Music)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쳐 가기 마련인 교향악이다. 물론 베에토벤의 교향곡들을 초보자들이 듣는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9개의 장대한 교향곡 중에서 제3번, 제4번, 제5번, 제6번, 제7번, 제9번은 생의 끝에서 음악을 그만 듣게 될 때까지 ‘들을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곡들이다.
악성(樂聖) 베에토벤은 불우한 유년시절, 방황하는 청년기, 병마와 기행으로 고립되었던 중년기, 음악 본연에 침잠했던 노년기를 보냈다. 멋진 예술가의 삶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그 때문에 그의 예술은 모나고 들쭉날쭉하기도 했지만, 훗날 인간 베에토벤이 악성이라고까지 불리게 된 것은 자신이 침잠한 ‘음악’으로 인간 정신을 배양하려 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가 평생 동안 작곡했던 교향곡, 피아노 소나타나 현악4중주에는 베에토벤의 인생 변곡점이 그대로 녹아 있다. 수줍고 짝사랑에 달뜬 소년이나 무관심과 배신에 분노하고 광기를 표출하는 청년의 모습이 있다. 때론 병들고 외로운 자신을 발견하고는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도 있다(하이리겐슈타트 유서). 그러나 종국에는 한 인간이 험난한 생의 장애를 극복하고 웅혼한 예술을 펼쳐보이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 생애를 걸쳐 작곡된 그의 교향곡들은 우리가 베에토벤이라는 존재를 떠올리게 하는 또 다른 자아(自我)이며 분신이다. 고전주의 교향곡의 틀(構造)에 반항을 시도하고(제3번, 제4번) 돌연 새로운 틀을 창조하며(제5번, 제6번, 제7번) 궁극적으로는 옛것과 새것을 녹여 태워 버리는(제9번) 숭고한 작업이 베에토벤의 교향곡들이다.
베에토벤의 교향곡은 구심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음악을 통해 영혼의 심연으로 끌어당기는 무서운 힘이다. 그의 악보에서는 모든 악기의 음들이 일사분란하게 절정과 소멸을 이어가고 결국 하나의 궁극(窮極)에 다다르게 한다. 그 핵(核)에는 베에토벤 본연의 악상과 심상이 단단히 뭉쳐 있는데, 베에토벤 음악의 시금석이고 삶의 지향점이며 예술적 이상이었다.
공자는 악경(樂經)을 편찬하면서 보편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動)이 음악(音樂)이라고 했다. 본래 베에토벤은 보통 인간이었다. 그에게도 기필코 벌어지는 운명이 있었고, 결국 그도 운명 앞의 하찮은 존재였다. 그런데 그는 음악의 힘을 알았다. 음악을 통해서 자신과 같은 보통 사람들이 신의 세계, 이상적인 세계를 꿈꿀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장대하고 격동적인 서정시 『교향곡 제5번』을 시작으로 깊게 사람들을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더욱 위대한 음악들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굴러 떨어진 돌을 다시금 주워 올리는 고난을 감내할 수 있었던 인간, 불행하고 비극적인 생의 운명에 저항한 위대한 영혼, 베에토벤. 그는 세상 만인이 피할 수 없는 “운명”적 존재가 되었다.
유재원 변호사
사법시험 제45회(연수원 35기)
국회 입법조사처 서기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