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오늘.
국정에 개입할 아무런 권원도 없는 일개 사인이 국정에 깊이 개입한 일로 나라가 어수선하다. 국정을 농락하도록 허여하고 기꺼이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나눠줬던 대통령은 탄핵소추된 상태이고, 유수 기업의 총수들은 수사대상이 되어 나라 안 사정은 그야말로 쑥대밭이다. 미국에서는 예상치 못한 대통령이, 중국과는 사드배치를 두고 마찰이, 일본은 자위대의 무력사용 범위를 넓히면서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듯한 의구심을 자아내는 이 상황, 나라 밖 사정도 썩 좋지 않다. 올해의 경제사정은 역대최악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우리가 맞는 오늘은 절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120여 년 전 서울. 1894년 조선은 굵직한 사건들이 연일 터진다. 1월에는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났고, 6월에는 갑오개혁이 실시되었으며, 8월에는 결국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일본은 조선 땅에 군사를 주둔시키는 것으로 모자라 지휘권마저 휘두르게 되었고, 이후 조선은 망국의 길로 접어든다. 이 시점에 오스트리아 사람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은 일본을 통해 조선으로 건너온다. 그에게는 한 없이 낯설었을 이국땅 조선, 이방인에게 비친 그해의 조선은 어떤 모습일까? “조선 1894년 여름”은 국내외적으로 가장 어지러웠던 조선을 이방인의 눈을 통해 보게 한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도시 중에서도 서울은 확실히 가장 기묘한 도시다. 25만명 가량이 거주하는 대도시 중에 5만여 채의 집이 초가지붕의 흙집인 곳이 또 어디에 있을까? 가장 중요한 거리로 하수가 흘러들어 도랑이 되어버린 도시가 또 있을까? 서울은 산업도, 굴뚝도, 유리창도, 계단도 없는 도시, 극장이나 커피숍이나 찻집, 공원과 정원, 이발소도 없는 도시다. 집에는 가구나 침대도 없으며, 변소는 직접 거리로 통해있다. 남녀 할 것 없이 모든 주민들이 흰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다른 곳보다 더 더럽고 똥 천지인 도시가 어디에 또 있을까?” 

그의 묘사는 충격적이다. 머릿속으로 더 이상 색감 있는 영상을 떠올리기 싫을 정도다. 그의 묘사는 조선의 주거, 정치, 사회, 문화, 군사 등 모든 눈에 보이는 분야에 대한 이방인의 호기심과 탐구를 토대로 그 이방인이 속해 있던 세상과 어디가 다른지 순식간에 훑는다. 그 이방인의 세상은 지금의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익숙한 풍경이니 당시의 조선이 얼마나 기괴해 보였을지 쉽게 상상이 된다. 

그러나 그의 기행문은 단순히 자신이 속해 있던 세상과 뭐가 다른지 이질감만 쫓지는 않는다. 그의 기행문은 흥미롭게도 조선이 고립되고, 정체된 채 러시아, 일본, 중국 사이에서 허물어져가는 이유를 쫓는다. 그는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많은 조선인들을 만나 모든 것을 기록한다. 그의 기록에는 자조와 체념이 섞인 백성의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 

“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일한다 말인가? 조선 남자의 욕구는 그리 크지 않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 집을 지으며, 집 안 시설이나 가구 같은 없고, 정말 필요한 살림도구는 매우 소박한 것들이다. (중략) 만일 그들이 정말 필요한 생계 유지비보다 더 많이 번다면 관리들에게 빼앗길 것이다. 이 관리들은 조선의 몰락과 이 곳에 만연한 비참함의 가장 주요한 원인이다. 관리들의 탐욕은 이윤 획득과 소유에 대한 모든 요구와 노동의지 그리고 모든 산업을 질식시켰다.” 

당시 나라의 주인은 왕이었고, 왕과 백성을 이어주는 것은 관리들이었다. 그런데 관리들에게 애민은 사라지고 오로지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에만 골몰한 지 오래였다. 민중의 봉기가 있었지만 대체로 쉽게 진압되었다. 동학운동의 실패는 민중의 저항의지가 꺾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일본군이 조선 땅에 주둔하고 조선군을 지휘하게 되는 빌미가 되었다. 조선의 실정을 둘러보면 무능한 정치체제와 부패한 관료주의가 계속해서 악수를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책의 저자 역시 이러한 상황 인식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서울에서 내가 볼 수 있었던 병사들은 모두 150~173센티미터 정도였다. 대부분 건장하고 우람했으며 영양상태가 좋았고 수염이 난 검게 그을린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어 친위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하지만 지휘관 아니 규율이 없어 지금까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기회가 없었다. (중략) 지난해 초 조선군은 자신의 나라 안에서 반란군에 쫓겨 달아났고, 일본군이 7월 말 왕궁을 점거했을 때에도 달아났다. 8천 명의 병사들은 아무런 지휘를 받지 못한 채 지푸라기처럼 흩어졌고, 그 결과로 지금은 일본인들이 이 나라의 주인이 되었다.” 

동학운동 직후여서인지 책의 여러 곳에서 당시 봉기가 일어나게 된 계기와 그 실패가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체류가 길지는 않았지만, 짧은 시간에 뛰어난 통찰력을 보인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는 조선 사람의 기질이 여간해서는 저항을 않고 순응하나, 그 도가 넘었을 때에는 얼마나 치열하게 저항하는지 직접 목격한 것이다. 그리고 부패한 국정 운영자들이 그 저항을 외세에 의존해 진압하는 악수를 둠으로써 결국 조선이 망국으로 가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역도집단인 동학도의 지도자가 쓴 이 성명서에는 조선의 곤경이 잘 묘사되어있다. 백성들을 진정으로 생각하고 있는 왕을 백성들은 사랑한다. 하지만 주도권을 쥐고 있고 양심의 가책 없이 나라를 노략질하고 있는 대신들과 관리들의 ‘무리’에 맞서기에는 왕과 백성들 모두 무력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책은 또 그렇게 비극적이지만은 않다. 조선이 쇠락하고 민중의 삶이 피폐해져 갔지만, 그 안에서는 여전히 삶의 잔재미를 간직하려는 노력들이 이어진다. 이방인인 헤세-바르텍은 이러한 모습 또한 놓치지 않는다. 

“조선인들은 수단이 허용하는 한 자신들의 방식대로 아주 잘 즐긴다. 이들은 음악과 카드놀이, 야외놀이, 권투, 씨름, 연날리기, 활쏘기 등을 열정적으로 좋아한다. 춤도 대단히 좋아하는데, 다만 직접 춤을 추지는 않는다. (중략) 조선에서 유랑하는 이야기꾼과 광대들의 작품은 우리의 연극에 해당한다. (중략) 이들 중에는 진짜 예술가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놀랄 만한 재능을 가지고 혼자 구성한 전체 드라마를 제공한다.” 

120여 년 전 망국으로 접어들었던 그 땅은 오늘 또 다시 어지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어떤 이들이 촛불을 들었듯이 또 어떤 사람들은 어지러운 나라를 구해야 한다면서 태극기를 흔들며 거리로 나선다. 

그러나 나라를 구한다면서 거리로 쏟아져 나온 태극기의 물결이 부끄러운 것은 왜일까. 120여 년 전 조선이 망한 이유는 민중의 봉기 때문이 아니다. 오늘 나라가 어지러운 이유는 촛불 때문이 아니다. 언제나 나라가 어지러운 탓은 국민이 아니라 국정을 운영하는 자들의 탓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지러워도 삶은 이어진다. 

최근 한국을 방문해 함께 촛불 집회에 참석했던 외국인 친구는 자기 조카들에게 줄 것이라면서 케이팝 씨디를 여러 장 사들고 갔다. 이 책을 덮으면서 외국인이 바라보는 우리의 현재는 어떨지 한 번 생각해본다. 겉모습만은 기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속을 들춰보면 국헌이 유린되고 법치가 허물어졌으며, 민주국가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블랙리스트가 정부 주도로 만들어졌다. 

우리의 주변 강국은 저마다의 계산 속으로 현재의 대한민국을 바라보고 있다. 무능한 왕권에 탐관오리가 판치던 120여 년 전과 뭐가 다를까 하는 생각이 스쳐 순간 섬짓하다. 

그래도 한 가지 그 우울한 망국의 역사가 지금 되풀이되지 않으리라는 희망을 본다. 그 희망은 깨어있는 국민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짧게나마 다녀갔던 친구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광장에서 보낸 저녁이었다고 하는 것 같다.

임제혁 변호사 사법시험 제49회(연수원 39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