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렸을 적 한번쯤 꿈꾸었던 것처럼 초등학교 시절 나의 꿈도 과학자였기에 가끔 서점에 들렀다 오는 내 손에는 과학자 지망생들에게 인기 있었던 ‘과학동아’나 ‘뉴턴’ 같은 잡지가 들려 있곤 했었다. 어느 날 잡지의 부록으로 아이작 아시모프 단편선집이라는 책이 붙어 왔는데 그 중 한 편의 내용이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될 정도로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었다.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The Bicentennial Man)’으로도 제작된 ‘이백살을 맞은 사나이’라는 다소 투박한 제목의 소설에서 주인공인 로봇 앤드류 마틴은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양자역학의 결과물인 양자 두뇌 덕분에 다른 로봇들과 달리 창의성과 주체성을 가진 존재로 그려진다. 우주의 원자 수보다 많은 수들로 인해 결코 인간을 넘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바둑의 영역에서 인간 대표 이세돌에게 패배를 안겼던 인공지능 알파고의 등장이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듯이 소설 속 중인공인 로봇 앤드류 마틴 역시 보통 인간에게는 가까이 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로봇인 앤드류 마틴은 소설 속에서 작가인 아이작 아시모프 자신이 주창한 로봇공학 3대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자유로운 인간이 되고자 하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의 소유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법정에 선 로봇 앤드류 마틴은 왜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냐는 판사의 질문에 “노예가 되고 싶으신 적이 있습니까, 판사님? 이 법정에서는 오직 인간만이 자유를 누리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오직 자유를 원하는 자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저는 자유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한다.
이 말에 마음이 움직인 판사는 “자유라는 개념과 자유로운 상태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진보된 정신을 가진 존재라면 그게 무엇이든지 자유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라고 판결을 내린다. 이후에도 인간이 되기 위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로봇 앤드류 마틴은 자신의 양자두뇌를 스스로 파괴하여 유한한 인간의 삶을 택함으로써 마침내 200살 생일에 앤드류 마틴씨로서 눈을 감는다.
인간이 자신 이외의 모든 인간 역시 자신처럼 존엄하다고 인정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일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들이 서로를 노예로 삼아 말을 할 줄 아는 짐승 내지 재산으로 다루었고, 검은 황금이라 불렸던 아프리카 흑인노예들은 19세기까지도 짐짝으로 노예선에 실려 대서양을 건너는 죽음의 항해를 해야 했다. 돌이켜보면 우리 역사에서 갑오개혁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노비제도가 온존했었다.
우리 사회를 둘러보면 아직도 우리 헌법의 최고 기본 이념인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일상적으로 무시되는 무수한 사례들을 보게 되는데 최근에는 ‘민중은 개, 돼지에 불과하다’는 대사로 유명한 영화와 흡사한 실제 사건이 알려지면서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2017년에는 수많은 촛불이 그 모든 어둠을 몰아내고 우리 헌법질서의 기본 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을 세우는 새로운 희망이 되길 빌어 본다. 앤드류 마틴씨가 간절히 되길 원했던 인간의 모습도 이런 것은 아닐 것이기에...
양희철 변호사
사법시험 제52회(연수원 42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