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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민 작가 <망하거나 죽지않고 살 수 있겠니> 독자후기

 

만족스럽게 차려입고 외출한 어느 겨울날, ‘일제시대 경성의 부잣집 딸’ 같다는 평판을 들은 적이 있다. 벌룬스타일 알파카코트의 허리끈을 졸라매어 리본으로 매듭짓고, 옅은 바이올렛색 체크무늬 클로시 모자를 눌러 쓴 모습이 아마도 복고풍 이미지를 연상시켰나 보다. 그때 나는 기왕이면 부잣집 딸 앞에다가 ‘친일파’라는 말을 덧붙여줬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건 당시 모 방송국에서 시대극 <서울1945>라는 드라마를 방영중이었는데, 친일파 문일평 자작의 무남독녀 문석경(소유진 분)에게 홀딱 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교시절 세계사와 국사를 좋아했지만 어쩐지 구한말, 그러니까 고종황제가 안경을 쓰고 있다거나 개량한복과 양장차림의 신사가 동시에 시내를 활보하는 사진이 실려 있는 ‘일제강점기’ 단원에 다다르면 마음이 불편해지곤 했다. 그것은 단순히 일본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개심이나 조국에의 애국심 때문만은 아니었고, 마땅히 구분되어야 할 옛것과 새것이 무분별하게 뒤섞여있다는 점 자체에서 뭔가 어긋났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당연히 국사책의 끝부분인 현대사 직전에서 시험문제가 출제되면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2000년 어느 가을, 문학동네 신인작가상 수상작이라는『망하거나 죽지않고 살 수 있겠니』를 구입하게 된 것은, ‘발칙하고 뻔뻔스러운 뒤집기’라는 칭찬 일색의 신문기사와 간간이 소개되는 ‘이십세기모던이미지댄스구락부’ 운운하는 소제목들에 유혹당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그간 홀대하던 조선 말기 역사를 수용하겠다는 심경의 변화였던 셈이다. 선입견을 버리기까지 수많은 시대극과 역사드라마가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드라마 <서울1945>는 일제 강점기 경성을 배경으로 6·25사변 전후의 과정을 철저한 고증과 화려한 복색으로 부활시켜, 역사에 대한 단순한 관심이 혼을 빼앗기는 듯한 애정으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방점을 찍어 주었다. 시청률 위주의 TV드라마와 함께 엮어 논하는 것을 순수문학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하는 부류도 있겠지만, 이지형(이지민 작가의 필명) 작가의 『망하거나 죽지않고 살 수 있겠니』가 <모던보이>라는 영화로 재탄생되고, 최근 세계문학상 수상작들이 줄줄이 스크린과 브라운관으로 옮겨지고 있듯, 원작소설과 영화는 다이아몬드 원석을 가공한 보석처럼 서로를 빛나게 하는 소중한 관계라고 여겨진다. 다만 <오래된 정원>의 경우에는 지진희, 염정아라는 아름다운 배우를 캐스팅하고도 소설에 들어있지 않은 대사와 장면을 사용하는 등, 오히려 황석영의 원작을 훼손하는 결과가 아니었나 싶어 마음이 언짢기도 하였다.


『 망하거나 죽지않고 살 수 있겠니』를 펼치자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시작하는데, 그 ‘나’가 남성이었다. 일반적으로 작가들은 동성의 입장으로 작중인물을 설정하는데, 단편도 아니고 장편에서 그것도 등단작품이 남성 화자라니 당황스럽기도 하였지만, 이지‘형’이라는 남성적 필명을 염두에 두고 읽어나가니 청년 이해명에게 동화되기가 훨씬 수월하였다.
더욱 낯설었던 점은 대부분의 일제식민지 시대극이 독립운동과 깊숙한 연관을 맺고 진지하고
비장하게 스토리가 흘러가는데,『 망하거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 ‘양심적인 친일파’까지 등장한다. 심사평에서 왜 ‘기발하고 신선’한 ‘뒤집기’라고 정의했는지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유려한 문체라거나 미문(美文)은 아니면서도 글쟁이로서의 재능이 바닷물 범람하듯 흘러넘치는 소설, 보여줄 것에 비해 지면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느낌, 단 한 문장도 불필요한 구절이 없고 문장 하나하나를 새로운 단편으로 펼쳐낼 수도 있을 듯한 충만함, 한마디로 ‘뽑아주기 싫어도 뽑아줄 수밖에 없는’ 단연코 뛰어난 작품이었다.

 

이지민의 소설은 쾌활하다. 발랄하고 경쾌하면서도 경박하지 않아서 좋다. 이지‘민’이라는 본명으로 돌아와 발표한 단편집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에서도 온갖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힌 인물들이 등장하고, 세부묘사가 너무나 적나라해서 과연 여성작가가 쓴 글이 맞는가 표지사진을 들추어 보게 만드는 대목들이 여럿 있지만, 그래도 읽기를 끝마치고 난 후 독자를 울적한 상태에 빠지도록 방치해두지는 않는다.

『타파웨어에 대한 명상』에서처럼 전쟁고아에서 대기업 이사로 출세했지만 폐암으로 생을 일찍 마감하는 허무, 죽음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아들을 몰래 병실로 불러내 생일을 축하해주며 케이크에 꽂혀 있는 촛불처럼 따스한 부성애로 어루만지는 아버지, 사회인으로 성장했지만 안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아들이 십여 년 전 아버지가 남긴 산타클로스 장식품을 발견하고 삶의 용기를 얻는다는 이야기... 촌스럽지만 나는 이런 류의 감동이 좋다. 그건 남들이 잘 입지 않는 옷차림이긴 하지만 일단 입으면 내게 어울려서 신기하다는 주변의 촌평과도 닮아 있을 것이다.

 

한승원은『 소설쓰는 법』에서 ‘허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 그 허무를 극복하는 생명력이 없다면 이 세상은 암흑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라고 썼다. 심각한 재료를 가지고도 어쩐지 웃음이 터져나오게 하는 전개, 어거지로 위로하려 들지 않지만 인생무상이라 외치지는 않는 작중인물, 경쾌하면서도 내공있는 작가의 발견이라는 점에서 9년 만에 재회한『 망하거나 죽지않고 살 수 있겠니』는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처럼 나의 뇌리를 반갑고도 장난스럽게 ‘툭’ 치며 인사한다.

 

김지아 변호사

한국건강가정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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