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년 전이다. 대학 도서관에 늘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에 슬리퍼 차림으로 돌아다니던 여학생이 있었다. 무심한 듯 스쳐 지나가다가도 흘낏거리게 되고, 항상 있던 그 자리에 보이지 않으면 도무지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복학생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여학생이었다. 봄바람에 벚꽃 흩날리는 이야기는 그만 접고, 그녀는 지금 날 닮은 아이의 엄마이자 대한민국 변호사이다.

염치없는 남편

남편이 경찰청 수사국에 근무하다 보니 “변호사 부인에게 굵직한 사건 좀 챙겨주지 않겠냐”는 말을 가끔 주변분들로부터 듣곤 한다고 한다. 늘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직(職)을 이용해서 사건을 알선할 만한 배짱이 없어 사건 수임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경찰관들 소청 사건을 실비로 부탁하는 입장이라 늘 면목이 없다. 게다가, 이제부터 이야기할 수사민원상담센터 상담변호사역을 떠맡기기까지 했다.

보다 더 국민 가까이에서법률서비스를...
수사민원상담센터 3년 성적표

상담센터는 경찰서 민원상담 과정에 자문변호사가 참여하는 곳이다. 우리나라는 이웃 일본에 비해 고소건수가 50배를 넘고 불기소율이 70%에 이르는 실정이기 때문에 상담과정에서 민사사안을 걸러내고 실제 수사가 필요한 사건에 수사역량을 집중하기 위해 마련한 제도이다.
전국 54개 경찰서에 상담변호사 900여 명을 위촉하여 운영한 성과가 놀라웠다. 경제팀 수사관 1인당 접수사건이 20% 가량 감소하였다. 그에 따라 1건당 수사기간이 단축되고, 기소중지 송치가 감소하여 민원사건수사의 질이 높아졌다.

민원사건 상담·반려는 1999년부터 시행해왔지만, 경찰이 고소·고발을 반려하는 것에 대한 불신과 반감이 있어왔다. 되돌려 세워진 민원인은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상담변호사의 역할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법률전문가인 변호사가 사실관계를 분석하여 민형사법리를 설명해주고 민사절차와 피해회복제도를 안내해주면 경찰서에 찾아온 민원인의 고민이 비로소 해결되는 것이다. 조사실 모니터를 두고 서로 마주 앉아야만 할 것 같은 경찰과 변호사가 민원만족을 지향하여 협업의 성과를 일궈낸 것이다. 생텍쥐페리는 “사랑은 두 사람이 마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국민의 인권과 권익 보호라는 가치를 위해 수사관과 변호사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실비 수준에도 못 미치는 자문비에도 불편한 내색없이 공익적 견지에서 성심성의껏 상담해주시는 변호사님들께 ‘열린 사랑방’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내년 자문예산확보를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는 걸로 민망한 변명을 대신하며 앞으로도 변호사님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자문을 부탁드린다.

국민들이 바라는 수사구조개혁에 관하여

반면에 같은 방향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수사와 기소가 바로 그것이다.
검찰은 수사와 기소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수사는 기소를 위한 준비절차로 보고 검사의 수사지휘가 필수적이라는 시각이다.
그러나 재판상 일방 당사자인 검사가 반대 당사자가 될 피의자를 수사하는 것은 피고인의 방어권을 제약하여 공정한 형사사법시스템에 심각한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 기소권을 가진 검사가 수사권을 행사함으로써 실체적 진실 발견이 아니라 유죄판결을 받아내기 위한 협박, 자백 강요와 같은 탈법 수사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패커(Herbert L. Packer)는 미국 범죄학의 고전인 「형 벌의 한계(The Limit of the Criminal Sanction)」에서 “인권보호를 위한 형사사법제도는 효율적이고 신속한 컨베이어 벨트가 아니라, 장애물 코스가 되어야 한다.”라고 역설한 바 있다. 검사가 수사와 기소를 독점하는 것은 불법적인 수사 관행에 대한 가장 중요한 통제 수단을 포기하고 수사·공소의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전근대적 형사사법 체계로 반드시 폐기되어야 한다.

이제 국민 인권보호와 책임 수사를 위해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바탕으로 ‘수사는 경찰이, 기소는 검찰’이 역할을 분담하는 형사사법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경찰은 수사전문가로서 책임 있는 수사를 하고 검사는 법률전문가로서 객관적 지위에서 기소권과 보완수사 요구권을 행사하여 경찰 수사를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다.

검찰은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가 국민의 인권보호를 위해 필요하다고 항변하고 있지만, 재판의 일방 당사자로서 기소를 목적으로 수사에 구체적으로 관여하는 검사의 수사지휘에 의한 인권보호 주장은 공허하기만하다. 검찰의 수사지휘권은 일제강점기에 형성되고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공고화된 전근대적 산물이며 국민의 인권보장을 위해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적폐일 뿐이다.
또한, 기관 자율성과 책임성, 인권보호 목적 등을 고려할 때, 경찰 수사에 대한 통제는 상명하복 관계를 전제로 한 검사의 수사지휘가 아니라, 사법통제와 변호인·언론 등 국민 눈높이를 맞는 수평적·기능적인 감시와 견제에 의해야 할 것이다.

최근 형사정책연구원에서 형사사법기관 신뢰도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 경찰(24.9%)이 가장 높은 반면, 검찰(16.6%)은 가장 낮게 나타났다. 또한, 권은희 의원실과 리얼미터가 공동시행한 설문조사에서는 검사의 수사, 기소권 분리에 대해 국민의 82.2%가 공감하고 있고, 검사의 권력에 대한 견제 방법으로 44.8%의 국민들이 경·검 수사구조개혁을 선택했다(공수처 신설은 19.4%)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민의 뜻에 의해 수사·기소·재판을 분리하여 국민의 인권보호와 편익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형사사법개혁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문득 봄바람이 느껴진다. 오늘은 퇴근길에 막걸리 몇 병 사들고 가서 변호사님과 나란히 앉아 창밖의 선유도를 바라보며 봄바람에 취해 볼까 한다.

박찬우 경정 경찰청